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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론직설] ‘선진국 초입 함정’ 빠진 韓…신인도 제고, 노동·연금·교육 개혁 나서야  

◆전광우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

올해 경제성장률·잠재성장률 모두 1%대로 추락 확실

국가역동성 하락 속 트럼프 2기 지경학적 위기 심화도

‘미국 예외주의’ 감안 한미동맹 강화·한미일 공조 지속

강력한 구조개혁·재정정책으로 ‘성장엔진’ 재점화해야

전광우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이 6일 서울 삼성동 무역센터 사무실에서 서울경제신문과 인터뷰를 갖고 경제위기와 잠재성장률 저하를 타파하기 위한 구조 개혁 방안을 설명하고 있다. 권욱 기자




우리 경제가 1990년대 이후 5년마다 1%포인트씩 성장률이 떨어지는 구조적 위기에 처했다. 올해는 계엄·탄핵 등 정국 불안 탓에 경제성장률이 1%대 중반까지 떨어지고 잠재성장률마저 1.8%로 추락할 것으로 우려된다. 초대 금융위원장을 지낸 전광우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은 6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국가적으로 역동성이 떨어지고 지정학·지경학적 위기 심화 속에 정치 불안정까지 겹쳐 ‘선진국 초입 함정’에 빠지고 있다”면서 “노동·연금·교육·산업 등의 구조 개혁을 통해 잠재성장률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 이사장은 “해외투자자들은 한국에서 한미 동맹을 핵심 축으로 한미일 공조를 지속할지 면밀히 보고 있다”면서 “이달 20일 출범하는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핵심 전략에 지혜롭게 대처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 경제가 올해 성장률 1%대 중반 추락이 예상되는 등 위기에 직면했다.

△지금 우리 경제는 2013년 1인당 국내총생산(GDP) 3만 달러대 진입 이후 조로 현상을 겪으면서 ‘선진국 초입 함정’에 빠진 형국이다. 경제성장률은 1990년대 이후 5년마다 1%포인트씩 추세적으로 하락했다. 국가적 역동성 상실, 산업 경쟁력 및 원천 기초 체력 약화, 인구 감소에 정치 위험까지 겹친 결과다. 1인당 GDP 3만 달러대 함정에 오랫동안 빠진 나라가 이탈리아·스페인·일본 등인데 우리도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트럼프 2기가 몰고 올 지정학·지경학적 ‘퍼펙트스톰’을 어떻게 대비해야 하나.

△트럼프 2기의 백악관 참모와 내각 구성을 보면 대중 강경론자가 많다. J D 밴스 부통령 당선인은 트럼프보다 한술 더 뜬다. 트럼프와 자문 그룹의 관심은 중국을 비롯해 러시아·북한·이란의 전체주의에 맞서 신냉전 시대를 확고하게 제어하는 데 있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 전략은 그가 가장 존경하는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부강한 경제, 힘을 통한 평화라는 레이거노믹스에서 따온 것이다. 지금 세계는 나 홀로 호황이라는 ‘미국 예외주의’가 심화할 정도로 세계경제에서 미국의 독주 시대가 열리는 역사적 변곡점을 맞고 있다.

전광우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이 창립 30주년을 기념한 ‘지정학적 도전, 기후변화 위기 그리고 세계경제 미래’ 책자를 들고 잠재성장률 제고 방안을 설명하고 있다. 권욱 기자


-저성장 고착화의 경제위기 상황에서 정치 리스크로 국가 신인도 저하가 우려되고 있다.

△1997년과 2008년 발생한 외환위기와 금융위기는 해외 위기가 우리에게 옮겨붙어 생긴 것이다. 이번에는 구조적으로 성장률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정치 갈등까지 분출해 위기가 심화되고 있다. 2016년 말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국회 탄핵소추 때는 지금보다 경기가 좋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외환시장은 금융위기 이후 가장 불안하고 소비 침체도 심각하다. 외부 충격 또한 트럼프 2기를 맞아 과거 어느 때보다 클 수 있다. 국가신용등급마저 떨어지면 정말 큰일이다.

-국가 신인도를 지키기 위해 지금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앞으로도 한미일 공조가 제대로 유지될 수 있느냐’는 미국 등 해외투자자들의 우려 섞인 물음에 확고한 답을 줘야 한다. 정치 안정과 한미 동맹이 중요하다. 12·3 계엄 사태 이후 해외 지인들이 ‘글로벌 롤모델인 한국이 어떻게 이렇게 됐냐’고 위로하면서도 국민들의 성숙한 시민 의식과 민주주의 회복력을 칭찬하더라. 위기 상황에서 하나로 뭉치는 능력은 우리의 DNA 아닌가. 정치만 바로 서면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다.



-결국 한국에 어떤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한미 동맹에 대한 확고한 관계 설정이 중요한데.

△그렇다. 해외 전문가와 투자가들이 가장 예민하게 보는 이슈가 ‘한국이 트럼프의 동북아시아 전략과 잘 조화롭게 갈 수 있느냐’이다. 자유주의자인 트럼프가 당선 후 처음으로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을 만났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밀레이는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작은 정부’를 지향하며 오랜 페론주의 타파에 나섰다. 트럼프가 1기 때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를 좋아했던 것도 자신과 정치 노선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반면 영국과 프랑스·독일의 정상과는 좀 껄끄러운 상황이다. 트럼프는 이번에도 유럽 국가들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방위비 분담을 둘러싸고 마찰을 겪고 있다. 우방인 캐나다·멕시코에도 불법 이민과 마약의 통로라며 25% 관세 부과를 내세우는데 두 나라의 지도자가 진보 성향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계엄·탄핵 정국 이후 한국 정치를 보는 해외투자자의 시각은.



△만약 한국 정치가 노조 우선과 반기업주의, 친중 정책 등의 방향으로 가게 되면 해외투자자들 입장에서 리스크로 볼 것이다. 트럼프는 미소 냉전 체제를 해체한 레이건을 롤모델로 해서 신냉전의 종말을 꾀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중국에 대해서는 디커플링 기조에서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확고한 한미 동맹을 바탕으로 중국과는 실용 관계, 일본과는 역사와 경제·외교·안보를 분리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다행히 우리는 미국에 비교 우위가 있는 조선업 등을 활용할 수 있다.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을 상당 수준 올려주더라도 원자력협정 개정 요구 등 주고받을 게 많다.



-노동·산업·교육·연금 등 핵심 구조 개혁이 지지부진하다.

△우리나라는 경직된 노동시장과 생산가능인구 감소 등 노동의 양과 질에서 문제가 크다. 특히 노동생산성은 미국의 절반 수준밖에 안 된다. 반도체 등 첨단산업 분야에서 주52시간제 규제 완화 등 유연한 노동 개혁이 시급하다. 비생산적 노조 문화도 바꿔나가야 한다. 삼성전자의 시가총액이 5년여 전에는 대만 TSMC와 비슷했는데 지금은 3분의 1밖에 안 된다.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핵심 분야 투자를 제대로 못 한 대가다. 중국이 내수 침체에 시달리면서도 ‘과학기술·첨단산업 굴기’에 총력을 기울이는데 우리도 산업 구조조정과 첨단산업 육성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반도체법 등 기업 활성화를 위해 정치권이 적극 나서야 한다.

-생산가능인구와 핵심 인재 감소 문제도 심각한데.

△우리나라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31위에 그친다. 여성의 ‘일과 가정 양립책’을 확대해야 한다. 인도 등 해외 우수 인재도 적극 받아들여야 한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더글러스 다이아몬드 미국 시카고대 교수는 ‘우수 인재가 의대 가서 성형외과 등으로 몰려서는 희망이 없다’고 하더라. 미국은 핵심 인재가 인공지능(AI) 등 첨단산업 분야로 간다. 의학도 중요하지만 기초과학·공학 인재를 키워야 한다. 패스트 팔로어(빠른 추격자)에서 퍼스트 무버(선도자)로 전환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 앞에서 교육 혁신이 절실하다. 국가 연구개발(R&D)과 벤처·스타트업에 대한 지속적 투자 확대도 중요하다. 금융·투자 시장의 자원 배분 시스템 또한 혁신적으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 ‘밸류업’ 추진 등 증시 활성화 역시 긴요하다.

-국민연금 개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데.

△보험료 인상 등을 통해 초고령화사회에도 지속 가능한 연금 체계를 만들어야 젊은이들에게 비전을 줄 수 있고 우리 증시에 대한 연기금의 투자 확대도 이뤄질 수 있다. 연금 개혁이 국장 탈출 행렬을 멈추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국민연금은 약 4000억 달러 선인 우리나라 외환보유액보다 많은 거의 5000억 달러의 외화 자산을 보유해 외환시장 충격의 완충 역할도 할 수 있다. 지난 20~30년간 주요 국가 중 국민연금 보험료를 올리지 못한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 지난해 5월 국민연금 개혁의 기회가 있었는데 놓쳤다. 올 정기국회에서는 꼭 연금 개혁안을 통과시켜야 한다.



-한국은행은 우리 잠재성장률을 올해부터 5년간 평균 1.8%, 2040년대와 2060년대에는 각각 0%대와 마이너스로 예상했다.

△1인당 GDP가 8만 달러대인 미국보다 우리 잠재성장률이 낮다는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만큼 우리 경제가 허약해졌다. 혁신 생태계를 만들지 못한 탓이 크다. 노동시장의 유연성에서 압도적 우위를 확보한 미국은 글로벌 인재의 블랙홀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증시나 실물경제에서 세계 자본의 미국 쏠림 현상도 두드러진다. 우리 개인투자자의 해외 주식 투자 비중 가운데 90% 이상이 미국에 몰려 있다.

-성장률 제고를 위해 재정 정책 병행도 중요한데.

△재정 건전성 회복이 중요한 과제이나 경제위기 타파를 위해 실기하지 않고 적극적인 재정 정책을 써야 한다. 가계부채가 심해 통화정책에 한계가 있어 재정의 마중물 역할이 필요하다. 반도체와 AI 데이터센터 송전선 같은 인프라에 대대적으로 투자해 기업 활성화를 꾀하고 석유화학 등 산업 구조조정의 촉매 역할을 하도록 해야 한다. 꽁꽁 얼어붙은 소비 진작도 필요하다. 독일이 마이너스성장에 빠지며 유럽의 성장 엔진에서 병자로 전락한 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에너지 정책 실패, 제조업 침체 등의 이유도 있지만 코로나19 시기에도 무리하게 재정준칙을 고수하다가 문제가 커졌다. 산업구조 전환이나 사회간접자본(SOC) 확충도 늦어지며 독일 내부에서 반성의 움직임이 있다. 통화·재정의 쌍발 엔진을 다 쓰면 좋지만 지금은 재정의 역할이 중요하다.

he is…

1949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사대부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인디애나대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시간주립대 교수와 세계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로 활동했다. 1998년 귀국해 경제부총리 특보와 외교통상부 국제금융대사, 금융위원장, 국민연금공단 이사장 등을 역임했고 2019년부터는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으로 재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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