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발전 업계의 불확실성이 엄청 확대됐습니다. 안 그래도 비상계엄과 탄핵 국면에 불안감이 컸는데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 원전을 줄이는 쪽으로 수정한다는 소식 때문에 더 커졌어요. 계엄이 터진 이후에 한국과학기술원(KAIST)은 학과 신청을 받았는데 4명만 신청했습니다.”
10일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서울에서 열린 ‘2025 원자력계 신년 인사회’에서 만난 A 교수는 “학부모들조차 원전은 계속 정치에 휘둘리니 여기 가면 먹고 살 수 없다고 한다. 다들 원자력공학과에 안 가는데 이대로면 원전의 미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이같이 말했다.
KAIST는 2학년 때 전공을 선택한다. 지난해 12월 6일 1학년들이 학과를 선택했는데 비상계엄 사태와 정치 위기가 겹치면서 원자력 및 양자공학과를 고른 이들이 4명에 불과했다. 지난해 입학생이 800여 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1%도 안 된다. 학교 내부적으로는 체코 신규 원전 건설 우선협상 대상자 선정과 신한울 3·4호기 착공, 당초 신규 원전 4기 건설 계획에 힘입어 학과 입학생이 적어도 10명 이상, 최대 20명까지 늘어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지난해 1학기(3명)와 엇비슷했다. 윤종일 KAIST 원자력과 교수는 “국내 원전 산업은 현재 국가가 주도하고 있다 보니 정부가 흔들리고 정치권에서 원전에 강하게 반대하면 종사자들은 많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며 “문재인 정부에서 탈원전 정책을 펼치기 전에는 한 해에 20~25명씩 들어왔지만 또 이렇게 쪼그라들어 미래가 매우 걱정스럽다”고 토로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관계자들은 거대 야당이 국정을 쥐고 흔드는 상황을 고려하면 원전 1기가 아니라 더 많이 감축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입을 모았다. 원전학과 B 교수는 “현재 업계에서는 11차 전기본상 신규 원전 4기 계획이 3기로 줄어드는 게 단순히 1기 축소가 아니라 향후에 더 줄어들 수 있다는 신호로도 받아들이고 있다”며 “전기본 확정 방식이 문재인 정부 때도 이렇지는 않았는데 더 심하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교수 C 씨는 “이번 정부에서도 결국 원전에 대한 장기 비전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원전 생태계 회복까지 갈 길이 멀고 미래 에너지 수요를 생각하면 원전을 훨씬 더 많이 지어야 하는데 여건이 어려워졌다”고 전했다.
당장 올해부터 원전 일감이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한국원자력산업협회에 따르면 2023년 국내 원전 산업 매출은 32조 1000억 원으로 역대 최대치를 경신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도 좋은 흐름을 이어갔지만 이마저 끊길 수 있다는 것이다. 매출의 90% 이상이 수출에서 나오는 한 원전 기자재 업체 관계자는 “원전 기업과의 동반 수출 확대를 기대했는데 국내 원전 산업이 또 쇠퇴하면 수출과 수주도 감소할 수밖에 없어 실적 악화가 예상된다”고 설명했다.
여당인 국민의힘 소속 이철규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위원장은 업계를 달래기 위해 애썼다. 그는 “정부의 원전 정책이 바뀌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는데 (원전 산업은) 과거 한 번의 비용 지출로 충분하다”며 “다시 혼란이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역설했다.
이날 정부는 차세대 원전 투자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유상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원자력계 새로운 기회와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미래 원전 시장 게임체인저로 자리 잡을 고온가스로(HTGR)·소듐냉각고속로(SFR)·용융염원자로(MSR) 등 차세대 원자력 개발을 위한 투자를 강화해나갈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최남호 산업통상자원부 2차관 역시 “차세대 원전인 소형모듈원전(SMR) 사업을 위한 투자를 더욱 본격화하겠다”고 했다.
한편 한미 간 원자력 공조는 올해 더 강화될 전망이다. 한국원자력산업협회장을 맡고 있는 황주호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은 이날 “한미 정부 간 원자력 수출·협력 약정(MOU)이 체결됐다는 것은 상업적인 부분도 잘 돼 가고 있다는 신호가 아니겠느냐”고 밝혔다. 체코 원전 수주와 관련해 미국 웨스팅하우스와의 지적재산권 분쟁이 조만간 해결될 수 있음을 시사한 것으로 읽힌다.
웨스팅하우스는 2022년 10월 한수원이 체코와 폴란드 등에 수출하려는 원자로가 자사 원천 기술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며 미국 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한수원이 웨스팅하우스 기술이 들어간 원자로를 수출하려면 웨스팅하우스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울경제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한미 정부가 8일(현지 시간) 원자력 수출·협력 MOU에 정식 서명하면서 한수원과 웨스팅하우스 간 갈등도 해결의 실마리를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웨스팅하우스는 한수원의 체코 원전 수출에 이의제기를 중단하는 대신 향후 한수원이 유럽 시장에 진출할 때는 웨스팅하우스의 승인을 받는 식이다. 사실상 미국과 동반 진출하는 개념이다. 대신 중동에서는 한국형 원전으로 진출하는 데 의견을 모은 것으로 전해졌다. 웨스팅하우스의 한 관계자는 “한수원이 유럽에서는 웨스팅하우스와 함께하고 중동은 독자 진출하는 안을 바탕으로 긍정적인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고 전했다.
한수원과 웨스팅하우스 사이의 분쟁 종식은 그동안 한국과 불편한 관계를 이어왔던 프랑스 출신 패트릭 프래그먼 웨스팅하우스 최고경영자(CEO)가 3월 말 물러나기로 한 것도 한몫했다. 정부 관계자는 “한수원과 웨스팅하우스 사이의 분쟁은 기본적으로 민간 영역의 일”이라면서도 “양국 정부 차원의 공조 확대에 웨스팅하우스가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고 해석했다.
다만 ‘팀 코리아’와 웨스팅하우스가 원전 수출 지역을 분담하는 타협안을 최종 도출할 경우 체코 원전 본계약 같은 급한 불은 끄는 대신 어렵사리 마련한 유럽 시장의 교두보를 잃게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은 원전 신증설이 가장 활발히 추진되고 있는 지역이다. 황 사장 역시 지난해 8월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스웨덴·핀란드·네덜란드·슬로베니아 등지의 고객들과의 계약이 더욱 가까워지고 있다”고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었다.
반대로 웨스팅하우스와 경쟁 관계를 형성하지 않는 선에서 유럽 진출국을 추가로 발굴할 수 있다는 낙관론도 있다. 현대건설이 지난해 11월 웨스팅하우스와 손잡고 따낸 불가리아 코즐로두이 원전 사례와 같이 한미 기업이 동반 진출하면서 설계와 시공 등 역할을 분담하는 시나리오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