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16일 금융통화위원회의 기준금리 동결 결정 후에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환율뿐 아니라 국제유가가 같이 올라가면 (물가에 미치는) 임팩트가 더 클 것”이라며 “물가 걱정이 크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두 차례 금리 인하 효과도 볼 겸 숨 고르기를 하면서 상황에 따라 판단하는 게 더 신중하고 바람직한 게 아닌가 판단했다”고 덧붙였다.
이 총재의 발언은 한은의 고민 지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새해 들어서도 원·달러 환율이 1450~1470원을 오르내리는 상황에서 추가적인 금리 인하는 한미 금리 차이를 더 벌려 원화 약세와 외국인 투자 자금 이탈을 부추길 수 있다. 비상계엄과 탄핵 국면 장기화에 지난해 12월 국내 주식과 채권 시장에서 38억 6000만 달러(약 5조 6300억 원) 규모의 외국인 투자 자금이 순유출됐다.
20일(현지 시간) 공식 취임하는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정책 방향도 커다란 변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예고한 대로 고율의 보편관세를 부과하면 미국의 물가가 치솟고 국채금리가 뜀박질할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금리 인하 스케줄이 뒤로 밀리게 되고 미 국채에 영향을 받은 한국 국고채 금리도 덩달아 상승할 수 있다. 한은 입장에서는 트럼프 당선인이 실제로 어떤 정책을 쏟아내는지 이후 유럽연합(EU)과 중국이 어떻게 대응할지를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는 후문이다. 한은의 사정에 정통한 금융권의 고위 관계자는 “미국과의 금리 격차가 최대 1.5%포인트가 나고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인하 카드를 아껴두고 싶었을 것”이라며 “경기를 고려하면 다음 달 금리를 내릴 수밖에 없을 텐데 결국은 시간 벌기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비상계엄 사태 이후 경기가 곤두박질치고 있다. 지난해 12월 소비자심리지수(CCSI)는 11월보다 12.3포인트 급락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첫해인 2020년 3월(-18.3포인트) 이후 최대 하락 폭이다. 지난해 12월 취업자 수 역시 2804만여 명으로 지난해보다 5만 명 이상 줄었다. 실업자도 17만 명 넘게 늘면서 46개월 만에 최대 증가 폭을 보였다. 이 총재는 “계엄 후 소비와 건설경기 등이 예상보다 많이 떨어졌다”며 “앞으로 수출 증가세가 둔화하고 소비심리 위축에 내수 회복세가 예상보다 더디면서 지난해와 올해 성장률이 지난해 11월 전망치를 하회할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다.
한은은 지난해와 올해 한국 경제가 각각 2.2%와 1.9% 성장할 것으로 예측했다. 하지만 지난해 4분기만 해도 탄핵 국면에 성장률이 0.2%를 밑돌 것이라는 게 한은의 전망이다. 주요 기관들도 올해 한국 경제성장률을 줄줄이 하향 조정하고 있다. UBS(1.9%)와 뱅크오브아메리카메릴린치(1.8%), JP모건(1.3)% 등 글로벌 투자은행(IB)은 한국의 올해 성장률을 1%대로 내다보고 있다. 잠재성장률(2%)을 밑도는 성장과 물가 목표(2%)를 웃도는 인플레이션이 더해진 스태그플레이션(경기 둔화 속 물가 상승)이 불가피한 셈이다. 이 총재는 “4분기 성장률이 떨어지면 기저효과로 인해 올해 성장률도 영향을 받게 된다”고 설명했다.
다음 달 금리 인하는 정부의 추가경정예산 편성과 시점을 최대한 맞춰 경기 부양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의도도 있다. 이 총재는 “통화정책만으로 경기를 부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추경이 필요하며 성장률이 예상보다 0.2% 정도 떨어진다면 한 15조~20조 원 규모의 재정 집행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 같은 경제 상황을 고려하면 한은이 다음 달 금통위(2월 25일)에서 금리를 내릴 가능성 높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금통위원 전원도 3개월 내 인하 가능성을 열어놨다. 시장에서는 한은이 연내 총 두세 차례 금리 인하를 단행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미국 연준의 점도표를 고려할 때 한은 올해 두 차례 인하 가능성이 크다”고 평가했다. 최남진 원광대 경제금융학과 교수는 “미국의 물가가 안정되면 한은의 올해 금리 인하가 세 차례 정도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총재는 또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비호한 것과 관련해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가장 중요한 메시지였다”고 밝혔다. 이 총재는 앞서 이달 초 기자들과 만나 최 권한대행의 헌법재판관 임명을 비난한 일부 국무위원에 대해 “대외 신뢰도가 어떻게 될지 고민 좀 하고 이야기했으면 좋겠다”고 지적했다. 전날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 집행과 관련해서는 “이를 계기로 정치와 경제가 분리된 것으로 말할 수 있다”며 “경제정책은 정상적으로 집행될 것이라는 얘기를 해외에 계속할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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