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할 생각이 있어서 그러시는 건가요.”
여권 인사들이 22일 금리·환율 등 경제 상황 점검과 현안을 논의하겠다는 목적에서 한국은행을 찾았다. 이 가운데 일부 인사는 이창용 한은 총재에게 직설적으로 캐물었다. 통화정책 책임자가 왜 재정 정책의 영역인 추가경정예산 편성을 자꾸 주장하느냐는 불편한 심기에서 나온 말이다. 송언석 국민의힘 의원은 “추경은 복잡한 정치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며 훈계하기까지 했다.
이 총재가 이 같은 논란에 휩싸인 것은 처음이 아니다. 이 총재는 지난해 외국인 가사도우미의 차등 임금 적용, 사과 등 일부 과수 품목에 대한 수입 확대, 서울 상위권 대학의 지역 비례선발제 도입 등 파급력이 상당한 의견을 개진해왔다. 이 때문에 고용노동부·농림축산식품부 등 주무부처와 대립각을 세운 일도 벌어졌다. 학자 출신의 송미령 농식품부 장관은 “과수 수입 확대에 대한 한은의 통계가 잘못됐다”며 공개 비판에 나섰을 정도다. 이 총재가 교육·출산·수도권 집중화 등 구조개혁과 관련한 각종 이슈에 적극 나서면서 한덕수 국무총리 후임으로 하마평에 오르기까지 했을 정도다.
정치적 중립성을 향한 이 총재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올해도 이어졌다. 이 총재는 기자들과 신년 인사를 겸해 만난 자리에서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에 대해 적극적인 비호에 나섰다. 이 총재는 최 대행의 헌법재판관 임명과 관련해 “경제를 고려한 불가피한 결정이었다”고 공개 지지했고 일부 국무위원들을 향해 “고민 좀 하고 이야기했으면 좋겠다”고 일갈했다. 최근에는 추경의 필요성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1분기 성장률 방어를 위해 적극적인 재정 정책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다. 이 총재는 적정 규모(15조~20조 원)까지 친절하게 제시했다. 야당이 추경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가운데 여당은 아직 완전히 입장을 정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은이 관례를 깨고 추경 금액을 제시하는 데 이르면서 여권의 불쾌함은 커졌고 전날 권성동 원내대표의 한은 ‘깜짝 방문’은 사실상 경고의 성격으로 풀이된다.
이 총재의 훈수는 국민연금으로까지 이어졌다. 그가 최근 “환헤지는 연금의 수익성에도 좋을 것”이라고 언급하면서다. 한 금융권 인사는 “수익성이든 공공성이든 환헤지가 궁극적으로 옳다는 건 연금도 알고 있다”면서 “다만 한은 총재가 보건복지부 소관의 기금 운용까지 왈가왈부하는 건 다른 문제”라고 전했다. 이 총재가 대외신인도 방어를 위해서 제 목소리를 내는 건 좋지만 적정 수준인지는 숙고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경제 정책 간섭에 대한 유혹이 크더라도, 월권으로 비치는 건 안 될 일이기도 하다.
일선 대학교의 한 경제학과 교수는 “이 총재의 최근 발언을 보면 중앙은행 수장으로서 할 수 있는 선을 넘은 것 같다”고 지적했다. 외부에서의 시각이 그 정도라면 이제는 한은의 역할에 집중된 정제된 메시지를 내놓는 것이 바람직할 때라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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