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너 일가 내에서 경영권을 확보하기 위한 암투로 기업가치가 30%가까이 증발한 한미약품(128940)그룹이 지주사에 전문 경영인을 선임한다. 한미사이언스(008930) 대표로 내정된 김재교 메리츠증권 부사장은 제약과 투자 분야를 두루 경험한 인물로 한미약품의 기술 이전을 지원하고 지주사의 신 사업 발굴에 주력할 전망이다. 송영숙 한미사이언스 대표 등 오너 일가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날 것으로 보인다.
모녀와 장차남 간 경영권 다툼…주가는 3만 9200→2만 8150원
2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한미사이언스의 주가는 28일 2만 8150원에 거래를 마쳤다. 경영권 분쟁을 겪으면서 갈등이 본격화 됐던 지난해 초(3만 9200원) 대비 기업가치가 28.91%나 급감한 것이다. 지난해 1월 한미약품그룹은 상속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OCI(456040)그룹과 통합을 추진했다. 송 회장의 지분을 매각하고 통합 지주사의 지분을 확보한다는 것이 골자다. 당시 석유·화학 산업에 주력하고 있는 OCI그룹과 통합을 발표하면서 이종 산업 간 결합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장남인 임종윤 북경한미 동사장, 차남인 임종훈 전 한미사이언스 대표가 강하게 반발하면서 경영권 분쟁은 본격화됐다. 임 동사장은 지난해 1월 서울경제신문에 “2020년부터 한미약품그룹에서 밀실 경영이 시작되면서 이런 사태가 발생할지 알고 있었다”며 “그때부터 총알을 마련해오면서 경영권 확보를 위한 모든 준비를 끝냈다”고 밝혔다. OCI그룹과 통합에 제동을 거는 가처분신청은 법원에서 기각됐지만 이우현 OCI그룹 회장이 통합 중단을 선언하면서 이종 산업 간 결합은 무산됐다.
그룹 오너 일가 내부에서 이 같은 다툼이 벌어지면서 한미약품그룹은 ‘신약 개발 명가’라는 수식어와 멀어져갔다. 실제 한미약품의 지난해 4분기 매출과 영업이익은 각 3516억 원, 305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각 16.7%, 56.6% 줄었다. 매출액과 영업이익은 시장 기대치를 약 16%, 45% 가량 밑돌았다. 신지훈 LS증권 연구원은 “경영권 분쟁과 의료 파업 등이 부진한 실적의 원인으로 추정된다”고 분석했다. 올해 초에는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 한국지수에서도 편출됐다.
기술 이전·벤처 발굴 경험한 김재교 메리츠 부사장 대표 선임
한미사이언스는 이달 이사회를 열고 김 부사장을 대표이사로 선임할 계획이다. 한미약품 그룹은 2010년 지주사 체제로 전환한 이래 창업주 고 임성기 전 회장, 송영숙 한미약품 회장, 임종윤 북경한미 동사장, 임종훈 전 대표 등 오너 일가가 한미사이언스 대표직을 맡아왔다. 김 부사장은 최초 외부 출신 대표가 된다. 한미사이언스는 최고재무책임자(CFO)에 심병화 삼성바이오로직스(207940) 상무도 영입하기로 했다.
김 부사장은 제약 산업과 투자에 대한 경험을 두루 갖춘 인물로 평가된다. 1990년 유한양행(000100)에 입사해 경영기획, 글로벌전략, 인수합병, 기술수출 등 전반적인 투자 업무를 30년 간 총괄해왔다. 특히 2018년 글로벌 빅파마 얀센에 폐암 신약 ‘레이저티닙’을 1조 4000억 원에 기술수출하는 ‘빅딜’을 이끈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2021년 메리츠증권에 합류해 바이오벤처를 발굴하고 육성하는 IND 본부를 이끌었다. 김 부사장은 지주사 대표로 한미약품그룹의 전반적인 투자 전략을 총괄하고 계열사 사업 조율 및 기술 이전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는다.
한미사이언스는 대표 선임을 시작으로 머크식 선진 지배구조 확립에 본격적으로 나설 계획이다. 송 회장과 임주현 한미약품 부회장은 글로벌 제약사 머크의 경영 구조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머크는 기업에 대한 가문의 통제력은 유지하면서도 회사의 경영은 엄격하게 분리하고 있다. 전문경영인에게 경영을 맡기면서 관리 감독은 머크 일가가 하는 구조다. 송 회장은 지난해 7월 “한미약품그룹은 기존 오너 중심 경영 체제를 쇄신하고 현장 중심 전문경영인 체제로의 재편, 사업 경쟁력과 효율성 강화를 통해 경영을 시급히 안정화할 방침”이라며 “대주주는 사외이사와 함께 참여형 이사회를 구성해 회사 경영을 지원하고 감독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따라서 현 대표인 송 회장은 경영 일선에서는 후퇴할 것으로 보인다.
제약 업계 관계자는 “지배구조 및 조직 재정비 등 경영 정상화를 위한 과제들이 쌓여 있는 만큼 지주사 대표의 역할이 중요한 상황”이라며 “신약 개발은 막대한 비용이 드는 만큼 전문경영인 시스템으로 얼마나 조직을 잘 이끌어갈지가 핵심”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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