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감독원이 이사의 주주 충실 의무가 ‘글로벌 스탠다드’라며 최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상법 개정안 시행을 촉구했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상법 개정안에 반발하는 경재계를 향해 공개 토론까지 제안했다. 반면 경제계는 이 원장과 금감원이 주요 선진국들의 사례를 과대 포장해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며 조목조목 반박했다.
이 원장은 19일 서울 여의도 금감원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상법 개정안 내용은 글로벌 기준을 따라하는 것”이라며 “우리만의 독특한 규제라는 주장은 가짜뉴스”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에 공개적인 열린 토론을 제안한다”며 “저는 자본시장 선진화와 관련해 험한 길을 마다하지 않겠다고 나서고 있는데 솔직히 다른 말씀을 하시는 분들께서는 무엇을 걸 것인지 한번 말씀을 나눠보자”고 말했다. 이어 “야당의 서두름으로 정책 이슈화될 것이 정쟁화되며 담론이 사라졌다”며 “어떤 부작용이 있고, 어떻게 추진해야 하는지 국민 앞에 논의하는 자리가 보다 건설적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이 원장은 최근 ‘직을 걸겠다’는 표현으로 논란이 된 상법 개정안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 반대 입장과 관련해서도 기존의 소신 발언을 이어갔다. 그는 “당국은 자본시장 선진화 관점에서 목소리를 충분히 내야 한다”며 “일부에서 금감원이 의견을 내라 말라 하는 것 자체가 월권”이라고 말했다. 이 원장은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재의요구권을 행사할 경우 “(재의요구권은)대통령이 행사하는 거고 (행사를 한다면) 따를 것”이라면서도 “그 전까진 자본시장 선진화 관점에서 저희의 목소리를 충분히 내야 한다”고 덧붙였다.
금감원도 기자간담회 직전 예정에 없던 자료를 배포하고 미국과 영국 판례법상 이사 충실 의무가 ‘회사’ 뿐 아니라 ‘주주’에 대해서도 인정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금감원은 “한국적 기업 지배구조의 특수성 및 국내증시의 투자자 보호 미흡이 밸류업(기업가치 제고)의 걸림돌로 지목되고 있는 상황”이라며 “기업들의 인식 전환 및 기업가치 제고를 위해 주주 보호 원칙 등 원칙 중심의 근원적 개선 방안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반면, 경제계는 이 원장과 금감원이 미국 등 주요 선진국들의 사례를 과대 포장해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우선 금감원은 미국 델라웨어주의 회사법을 예로 들며 미국에서도 주주를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으로 포함했다고 설명했으나 미국 50개주 중 회사법에 이사의 충실의무에 주주가 언급된 법은 델라웨어와 캘리포니아주(州) 단 두 곳 뿐이다.
한국경제인협회 관계자는 “외국의 어느 입법례에서도 이사가 (회사가 아닌) 주주에게 직접적으로 충실할 의무를 진다는 규정은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델라웨어법은) 이사의 책임을 주장하는 자가 이사의 귀책사유를 증명하지 못하면 이사는 주주나 회사에게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을 명시한 규정”이라며 “최근 국회를 통과한 상법 개정안처럼 주주에 대한 이사의 책임을 강행하지 않는다”라고 설명했다.
금감원이 또 다른 예로 든 미국의 모범회사법도 마찬가지다. 금감원은 이사가 공정하게 대할 의무를 가진 상대방에 회사와 주주를 함께 규정했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모범회사법은 각 주의 회사법에 대한 모범규준일 뿐 법적 효력이 없다. 또 모범회사법에 명시된 ‘이사의 행동 기준’ 규정은 이사가 직무를 수행할 때 주주가 아닌 ‘회사’의 이익에 최선의 결과가 될 수 있도록 결정해야 한다(in a manner the director reasonably believes to be in the best interests of the corporation)고 규정하고 있다.
금감원이 ‘이사가 주주의 이익을 침해할 수 있는 특별한 거래 상황에 놓일 때 주주에 대한 의무를 우선해야 한다’고 제시한 영국의 회사법 판례도 심각한 과장이 있다고 경제단체들은 꼬집었다. 앞서 영국 고등법원은 2019년 판결에서 “회사의 이사는 단순히 이사라는 지위만으로 주주에 대해 충실의무를 부담하지 않는다는 일반론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선을 그었다. 그런데 금감원은 이사가 ‘특별한 거래 상황’에 놓인 상황을 예로 들어 이사가 주주에게 충실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문제는 해당 판결은 이 특별한 상황을 △이사가 주식 처분과 관련해 매수자이거나 매수에 관심이 있거나 △소규모·가족 소유 기업 등 일반적인 이사와 주주의 관계가 아닌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로 한정하고 있다. 한경협은 “매우 특별하고 제한적인 경우에만 한정되는 사례에 한정된다”고 지적했다.
경제단체들은 이 원장이 한국은행 보고서(주주환원 정책이 기업가치에 미치는 영향)를 근거로 “일반 주주 권익이 강화되고 주주 환원에 적극적일수록 기업 가치가 올라간다”고 주장한 데 대해서도 보고서 내용을 취사선택했다고 지적했다. 이 연구는 주요 20개국(G20) 중 16개국 3560개 기업을 대상으로 주주 환원이 기업가치에 미치는 영향을 실증분석했다. 그 결과 일반 주주의 권익이 강화될 수록, 주주 환원을 적극 실시해 기업가치가 상승했다.
이에 대해 한국경영자총협회 관계자는 “해당 보고서는 ‘시설투자, 연구개발과 같은 자본지출(투자)이 기업 성장의 핵심 요소인 산업의 경우 여유자금을 주주환원에 과도하게 사용하면 오히려 기업가치 제고를 저해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반도체와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기술 기업이 필요 이상으로 주주환원에 나서면 기업가치가 오히려 떨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경총은 “이와 같이 산업별로 기업가치 제고 방식이 다를 수 있고 이에 따라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식이 다를 수 있다”라며 “모든 산업과 모든 기업에 대해 광범위한 영역에서 적용될 수 있는 상법을 개정하는 것은 주주보호라는 목표에 효과적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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