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소재 스타트업인 A사는 자체 설비를 구축, 공장을 가동하기 위해 기술보증기금에 시설자금을 신청했지만 거절 당했다. 자체 제조한 기계 설비가 ‘감정 평가 불가’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레이저용접기·전기모터 등 기성 설비의 경우 감정가가 나오고 일정 부분 보증 금액을 정할 수 있지만 자체 기술로 만든 장비는 적정한 가치를 평가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결국 이 기업은 신용대출과 투자 유치 사이에서 급하게 대안을 찾아 나서야 했다. 자체 기술력으로 제조 설비를 구축하는 곳이 시설자금을 지원받지 못하고 타 제조사의 설비를 구축한 기업에 밀리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기보 측은 “이 기업의 경우 시설자금이 아니라 운전자금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이라며 “자체 개발한 장비의 경우 기업이 제시한 내용만으로는 적정한 가치를 판단하기 어렵고 자칫 도덕적 해이 문제가 발생할 수 있어 시설자금은 외부 설비를 구축한 경우에 지급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A사는 운전자금만으로는 운영이 역부족이라는 입장이다.
스타트업 생태계의 침체가 계속되는 가운데 현장에서는 ‘기보와 신용보증기금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있다’는 말이 왕왕 나온다. 기보의 설립 취지는 잠재력이 있는 기업의 기술을 평가해 보증하고 금융기관으로부터 자금을 확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 있다. 스타트업 경기가 침체되고 기술특례 상장 매출액 요건도 까다로워지다보니 기보 역시 매출액을 담보로 대출을 보증하는 신보와 비슷하게 안정성에 집중하고 있다는 게 불만의 목소리다. 기보는 신보와 달리 당장 발생한 매출액이 아니라도 계약이나 수주 등 진행상황을 고려해 향후 발생할 매출액까지 살펴 기술 평가에 나선다는 입장이다. 그럼에도 기보가 좀 더 도전적으로 기술력과 미래 가능성을 봐야 한다고 스타트업들은 절박하게 호소한다.
미국 정부에서 지원하는 SBIR(Small Business Innovation Research)은 오로지 기술력으로만 검증을 해 각 단계에서 최대 200만 달러의 정책자금을 집행한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퀄컴은 1985년 설립 당시 아이디어 상태에서 지원을 받아 무선통신칩의 핵심 기술을 개발했다. SBIR 전문가들의 독자 기술 리뷰 시스템이 큰 역할을 했다. 기술이 자산이 되지 못해 좌절하는 창업자가 없도록 질문을 달리 해야 한다. ‘이 기술이 적정하게 감정 가능한가’가 아니라 ‘이 기술이 내일을 바꿀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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