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대만 TSMC를 찾아 인공지능(AI) 반도체 고대역폭메모리(HBM) 분야 협력을 다짐했다. 세계 최고 AI칩 설계사 엔비디아와 밀월 관계를 유지 중인 SK가 TSMC와도 끈끈한 우정을 과시하며 HBM ‘삼각 동맹’을 굳건히 하는 모습이다.
11일 업계에 따르면 최 회장은 이번 주 초 대만을 찾아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업체 TSMC를 비롯한 반도체 기업들을 만났다. 이번 출장에는 곽노정 SK하이닉스(000660) 최고경영자(CEO) 등도 동행한 것으로 전해졌다. 최 회장의 대만 출장이 공개된 것은 지난해 6월 이후 10개월 만이다. 당시 최 회장은 웨이저자 TSMC 이사회 의장(회장) 등과 만나 “인류에 도움 되는 AI 시대 초석을 함께 열어가자”고 제안하고 HBM 분야에서 양 사 간 협력을 강화하는 데 뜻을 모았다.
SK하이닉스는 23일(현지 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타클래라에서 열리는 TSMC 테크놀로지 심포지엄에도 참가한다. 이 행사는 TSMC가 매년 주요 파트너사들을 초청해 각 사의 신제품과 신기술을 공유하는 자리로 미국을 시작으로 중국과 네덜란드 등 세계 각지에서 개최된다. SK하이닉스는 이 행사에 지난해부터 참가해 HBM3E(5세대), 차세대 그래픽 D램인 GDDR7 등을 선보였다. 올해는 하반기 양산 예정인 HBM4를 중심으로 부스를 꾸릴 것으로 전망된다.
앞서 SK하이닉스는 지난달 엔비디아가 주최하는 AI 콘퍼런스 ‘GTC 2025’에 참가했다. 이 행사에서 HBM4 모형을 처음으로 선보이고 주요 고객사들을 대상으로 세계 최초 HBM4 12단 샘플을 제공한다는 사실도 깜짝 발표하면서 엔비디아와의 견고한 협업 관계를 강조했다. 이로부터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TSMC와 HBM 개발 청사진 공개에 나선 것이다.
이번 행사에서 SK하이닉스는 첨단 패키징 기술과 관련한 TSMC와의 협업 성과도 밝힐 것으로 보인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4월 TSMC와 기술 협력에 대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며 협력을 대폭 강화했다. 기존에는 TSMC가 SK하이닉스의 HBM을 받아 패키징하는 방식이었지만 HBM4부터는 아예 양 사가 개발 과정을 함께했다. HBM의 ‘두뇌’ 역할을 하는 로직다이를 TSMC의 파운드리 공정에서 만들면서 끈끈한 공급망 관계가 형성됐다. 이렇게 만들어진 HBM 제품은 엔비디아가 내년부터 양산하는 AI칩 루빈에 탑재된다.
SK하이닉스가 엔비디아·TSMC와의 삼각 동맹에 주력하는 이유는 승자 독식 구도가 강해지고 있는 AI 반도체 시장에서 주도권을 이어가기 위해서다. 엔비디아는 난도가 높은 퀄(품질) 테스트를 통과한 소수 기업에 AI 가속기용 HBM 주문을 몰아준다. 키움증권에 따르면 지난해 HBM 시장 점유율은 SK하이닉스 65%, 삼성전자 32%, 마이크론이 3%를 기록했다. 높은 점유율에 힘입어 SK하이닉스는 지난해 전 세계 D램 시장에서 삼성전자를 제치고 처음으로 1위에 오른 것으로 관측된다.
AI 가속기의 성능이 강화될수록 이에 맞는 성능의 HBM이 필요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개발 속도가 빠른 SK하이닉스 물량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지난달 GTC에서 2년 후 양산을 계획하는 ‘루빈 울트라’에 현 제품(블랙웰) 대비 5배 이상의 HBM이 탑재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맞춤형으로 변화하는 HBM 비즈니스의 특성도 동맹 강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HBM4를 시작으로 그래픽처리장치(GPU)의 연산 기능 상당 부분이 메모리 반도체로 넘어온다. AI 칩과 HBM 설계 단계부터 3사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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