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게임용 그래픽처리장치(GPU) 전문 업체였던 엔비디아가 단숨에 글로벌 반도체 매출 1위에 등극하고 전통의 강자 인텔이 3위로 추락한 배경에는 인공지능(AI)이 있다. SK하이닉스(000660)가 두 계단이나 훌쩍 뛰어오른 4위를 기록한 것도, 삼성전자(005930)가 2위 자리조차 불안해하는 것도 결국 AI의 물결에 올라탔는지 여부에서 갈렸다는 평가다. AI가 정보기술(IT) 업계의 대세로 자리 잡은 만큼 앞으로도 AI 대응 능력에 따라 반도체 업계의 지형이 재편될 것으로 전망된다.
11일 가트너가 발표한 전 세계 반도체 매출 조사에는 AI가 촉발한 패러다임 변화가 그대로 드러난다. 그간 매출 순위에서 상위권을 차지해온 단골 기업들은 개인용 컴퓨터 산업으로 부상한 인텔과 모바일·컴퓨터 등에 메모리반도체를 공급하며 덩치를 키운 삼성전자였다. 하지만 2022년 말 오픈AI가 챗GPT를 내놓으면서 막을 연 생성형 AI 혁명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AI 반도체를 설계하는 엔비디아와 같은 기업들이 무대 한가운데로 올라선 것이다.
AI 반도체는 기존 중앙처리장치(CPU)와 달리 병렬 컴퓨팅과 클러스터링 기술 등이 핵심 기술력이다. 엔비디아는 어떤 업체보다 AI 시대를 빠르게 예측해 AI 연구자들의 수요를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GPU 설계 역량을 키워왔다. 또 멜라녹스 같은 기업들을 공격적으로 인수하며 여러 GPU를 통합하는 클러스터링 기술을 내재화했다. 클러스터링 기술은 수많은 GPU와 서버들이 한 몸처럼 작동하게 하는 기술로 AI 모델 훈련과 추론 등에서 막강한 능력을 드러내며 타사를 압도하는 원동력이 됐다.
SK하이닉스의 약진도 AI 덕분이다. SK하이닉스의 지난해 매출액 성장률은 91.5%로 엔비디아(120.1%)를 제외하면 상위 10개 기업 중 가장 높았다. 올해 같은 상승세를 유지한다면 내년에는 충분히 3위를 노릴 수 있다. 메모리 만년 2위로 불렸던 SK하이닉스는 AI 시대를 예측해 단기 성장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은 고대역폭메모리(HBM) 개발에 매진했다. 그 결과 HBM 수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엔비디아의 주력 공급처로 자리매김하며 메모리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시장조사 기관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올해도 엔비디아는 최선단 HBM인 5세대 HBM(HBM3E)의 85% 이상을 가져갈 예정이다. SK하이닉스 역시 올해도 HBM 매출 신기록을 이어갈 것으로 기대되는 이유다.
반면 AI 흐름에서 벗어났다는 평가를 받는 인텔은 1위에 올라선 지 1년 만에 3위로 내려앉았다. 인텔 역시 가우디 시리즈라는 AI 가속기를 내놓고 있지만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 삼성전자도 지난해에 이어 2위를 차지했지만 안심할 수 없다. 매출이 60.8%나 올랐지만 이는 HBM 등 미래 기술의 기여보다는 최악의 한파를 맞았던 2023년 이후 메모리반도체 가격이 반등한 영향이다. 삼성전자는 여전히 HBM 등에서는 SK하이닉스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재도약하기 위해서는 HBM에서 의미 있는 성과가 나와야 한다는 게 업계의 공통된 시각이다.
올해 반도체 산업 역시 AI 흐름을 탄 기업들이 성장을 주도할 것으로 보인다. AI 혁신은 언어 처리와 이미지 생성을 넘어 로봇·자율주행 등 물리적인 응용처, 인간을 대신하는 AI 에이전트 등으로 확산 중이다. 이에 발맞춰 AI 연산 수요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게다가 딥시크의 R1, 메타의 라마4 신규 출시 등으로 값싸고 똑똑해진 모델은 AI 비용까지 낮추며 AI 확산을 자극한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지난달 열린 자사 연례 개발자 회의 ‘GTC 2025’에서 “지난해 전 세계가 잘못 알았다”며 “올해 AI에 필요한 컴퓨팅 연산량은 지난해 이맘때 예측했던 것의 100배는 더 많다”고 말했다.
업계 관계자는 “AI 연산 수요를 충당해줄 수 있는 곳은 결국 엔비디아밖에 없다”며 “엔비디아와 밀접한 SK하이닉스 등 AI 생태계 기업들의 영향력이 한동안 굳건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