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의 몰락과 리더의 현실 인식 실패
1999년 겨울 대우의 몰락은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논란 거리로 남아있다. ‘세계 경영’을 기치로 내세우며 이전에 없던 시장을 개척한 전무후무한 기업인의 공과를 인정해야 한다는 쪽과 이 같은 공이 최대 규모의 분식회계라는 과(過)로 무참히 무너졌다는 쪽이 팽팽하다.
“수출을 늘려 외화를 벌어 들이고 이 외화로 국가와 기업의 외채를 상환할 수 있습니다.”
IMF 외환위기 당시 연간 500억 달러 이상의 무역흑자 달성을 목표로 내세우면서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이 했던 말이다. 전 산업계가 수출 총력전을 벌이면 원화대비 달러 환율이 올라 있기 때문에 수출도 잘 되기 때문에 공격적인 수출만이 살 길이라고 강조했다. 1998년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이기도 했던 만큼 김 회장의 발언의 영향력은 컸다.
문제는 이 기간 막대한 부채가 생기는 것을 눈 감기 위해 부채 규모를 줄이는 분식회계 또한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키워갔다는 점이다. 수출을 할수록 부채가 늘어났고 분식회계 규모는 41조원에 달하는 수준으로 불어났다. 이 같은 분식회계는 지속가능성이 없었다. 결국 김 전 회장은 한때 한국 경제사에서 ‘대망 (大望)’의 존재에서 ‘대망(大亡)’의 상징으로 추락했다.
틀릴 수 없는 리더가 만든 문제
시간이 흐를수록 대우의 몰락은 단지 외환위기의 불운이나 사업 확장의 무리수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평가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틀릴 수 없는 리더’가 만든 조직, 곧 실패를 인정하지 못하고 내부 문제를 축소하며 진실한 대화를 차단했던 구조가 본질적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김 전 회장은 리더로서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고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용기를 발휘하는 데 실패했다. 행동의 결과는 기업 전체를 희생으로 마무리됐다. 리더가 갖추는 정직함의 가치가 조직 전체의 운명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 지 섬뜩할 정도로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그렇다면 반대의 경우, ‘틀릴 수 있는 리더’가 이끄는 조직은 어떤 길을 걸었을까. 문제를 뚜렷하게 직면하고 실수를 투명하게 드러내며 정직한 질문을 조직의 문화로 만든 기업. 바로 엔비디아가 그런 사례다.
엔비디아에서는 일종의 윤리로 ‘지적 정직함(Intellectual Honesty)’의 가치를 내세운다. 이는 진실을 추구하는 태도이자, 실수를 인정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지적 허영심이 있는 사람은 모르는 것이나 취약점이 노출되면, 그로 인해 자신의 평가가 좌우될 것을 우려한다. 이 때문에 실패를 쉽게 인정하지 못하고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잘못된 일이 생기면 이를 축소해 보고하거나 다른 데서 원인을 찾아 일을 키울 우려가 있다. 빠른 속도와 경계 없는 소통을 중시하는 엔비디아에서 가장 염려하는 것은 결정적인 순간에 문제 해결의 ‘골든 타임’을 놓치는 것이다.
지적 정직함은 일종의 메타인지에 가깝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만약 실수가 있었다면 이를 인지하고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좀 더 정확히는, 자신의 현재 상황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실패나 실수에 대해 자기변명을 내놓기 보다는 열린 자세로 다른 사람의 피드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젠슨 황부터 이를 실천하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지난해 상반기 내내 고공행진하던 엔비디아의 주가를 무너뜨린 건 차기 아키텍처 시리즈인 ‘블랙웰’의 출하 지연 문제였다. 시가 총액(시총)이 3조 달러에 달했던 엔비디아의 주가가 순식간에 고꾸라졌다. 한동안 다양한 의견이 분분했다. 지난해 8월의 2분기 실적 발표 때는 호실적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블랙웰 출하 지연 문제로 주가가 시간 외 거래에서 8% 이상 떨어지기도 했다. 한동안 이에 대한 추측으로 엔비디아와 TSMC의 오랜 동맹이 깨어졌다는 내용이 보도되는 등 블랙웰 결함으로 인한 출하 지연에 어느 쪽에 책임이 있는지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다 지난 해 10월 젠슨황 엔비디아 창업자는 “블랙웰의 디자인 결함은 100% 엔비디아의 잘못(Fault)으로 비롯됐다”며 “TSMC의 도움으로 이를 해결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리더가 먼저 ‘지적 정직함’을 발휘한 사례였다. 당장 시장에 단기적인 충격을 주더라도 오래갈 수 있는 신뢰를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실천한 것이다. 이를 잘 극복하고 내실을 다진 엔비디아는 지난 9일(현지 시간) 역사상 최초로 시총 4조 달러를 달성한 기업이 됐다.
엔비디아의 진짜 무기는 ‘틀릴 수 있는 리더십’에 있다. 누구나 자신이 내세운 전제를 새롭게 점검하고 틀리면 수정할 수 있도록 한 것. 이는 리더들도 예외가 아니다. 실패 역시 빠르게 실패하는 것을 장려할 뿐 실패 여부는 개인에게 낙인을 남기지 않는다. 젠슨 황은 지난 12월 스타트업벨과의 인터뷰에서도 이같이 말했다.
“매일 늘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이 결정의 전제가 여전히 유효한가’. 그렇지 않다고 판단되면 언제든 바꿀 수 있습니다. 리더인 저를 포함해서요.”
모바일 칩 ‘테그라’가 퀄컴의 견제 속에 시장에서 설 자리를 잃었을 때도 과감히 이를 인정하고 철수했다. 대신 GPU 가속 컴퓨팅 시장에 베팅을 해 딥러닝의 포문을 열었고 AI 시대에 최고의 기업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제가 다 망쳤습니다” 한마디
오늘날 영상 구독 서비스의 절대 강자가 된 넷플릭스도 잘 못된 판단으로 고객을 잃었을 때가 있었다. 모바일 시대가 열렸던 2011년 넷플릭스는 기존의 DVD 우편 대여 서비스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 서비스를 ‘퀵스터(Qwikster)’라는 별도 브랜드로 분사해 운영하고 동영상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를 넷플릭스라는 브랜드로 운영하겠다고 발표했다. 한 계정을 갖고 한 사이트에서 두 가지 서비스를 이용하던 고객들이 저마다 각 계정에 가입을 하고 별도로 요금을 내야 했다. 이 과정에서 DVD와 스트리밍 매체 간 평점, 리뷰 등 이용자가 오랫동안 이용하며 쌓은 아카이브가 연동되지 않아 이용자들이 불편을 겪었다. 결국 분사 발표 이후 80만명의 가입자를 잃었다. 주가 역시 급락했다.
리드 헤이스팅스는 3주 만에 이 결정을 전면 철회하면서 구성원들에게 보낸 이메일을 통해 이 같이 말했다.
“제가 다 망쳤습니다. 여러분께 설명을 드릴 책임이 있습니다. 변화를 전달하는 방식에서 큰 실수를 저질렀고 고객 경험의 단순함의 가치를 과소평가 했습니다.”
리더로서는 잘못된 결정을 먼저 인정하고 사과한다는 게 뼈아픈 부분이었지만 넷플릭스가 쌓은 ‘진실의 문화(culture of candor)’를 실천한 데 가까웠다. 이는 조직 내에서 솔직하고 투명한 소통을 핵심 가치로 삼는 문화로, 불편한 진실이나 비판적 의견도 숨기지 않고 전달하는 과정에서 조직 전체가 성장할 수 있다는 차원이다. 이 일을 통해 넷플릭스는 조금 더 빠르게 스트리밍 서비스로 전환할 수 있었고 모바일 시대의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하는 결과를 낳게 됐다.
정직함은 전략이자 생존방식
대우가 무너진 날 우리 사회는 ‘정직하지 못한 리더십’이 만들어낸 시스템의 끝을 목격했다. 반면, 엔비디아와 넷플릭스는 실수를 빠르게 직시하고 수정할 수 있는 용기, 리더조차 틀릴 수 있다는 전제를 문화로 삼은 조직이 어떻게 살아남는지를 보여줬다.
정직함은 단지 윤리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전략이자 시스템이며 생존 방식이 될 수 있다.
리더는 늘 물어야 한다.
“지금의 결정은 여전히 옳은가?”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걸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 질문에 스스로 답할 수 있을 때 조직은 비로소 진짜 미래로 나아간다.
당신이 있는 조직은, 그 질문을 허락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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