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산업은행이 지난달 여천NCC 공동 주주인 DL그룹 측에 “자금 지원이 제때 이뤄지지 않으면 신규 무역금융 계약이 어려울 수 있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여천NCC가 운영자금 결제를 감당하지 못해 대주주에 자금 지원을 요청했는데 DL 측이 자금 지원을 머뭇거리자 압박 수위를 높인 것이다. 여천NCC는 그동안 산은에서 약 1000억 원 규모의 크레디트 라인(여신 제공 한도)을 열고 무역금융을 이용해왔다. 만기 도래 시점에 맞춰 매번 신규 계약을 체결해왔는데 이것이 갑자기 끊기면 여천NCC의 자금난이 커질 수 있다. 산은의 고강도 압박에 DL 측은 결국 1500억 원 규모의 신규 자금을 대여하기로 했다.
자금 지원이 이뤄진 뒤에도 산은이 대주주들에게 대여금의 출자 전환 필요성을 제기한 것은 중국발 저가 공세에 석유화학 업황 부진이 장기화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특히 여천NCC의 경우 회사채 조기 상환 리스크가 현실화할 수 있는 수준으로 부채비율이 치솟은 점이 리스크 요인으로 꼽힌다. 실제로 내년 3월 만기가 오는 73-2회 공모 회사채를 포함해 2000억 원 규모의 회사채에 부채비율을 400% 이내로 관리해야 한다는 조항이 담긴 것으로 전해졌다. 부채비율이 마지노선을 넘기면 투자자들의 조기 상환 요구가 거세질 수 있는 만큼 산은이 대주주의 고통 분담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선제적으로 주문한 것이다.
시장에서는 산은이 여천NCC를 시작으로 석유화학 업계 전반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여갈 수 있다는 얘기가 새어 나온다. 산은의 10대 석유화학 업체에 대한 대출채권 잔액은 지난달 말 기준 5조 7939억 원에 달한다. 이 중 1년 내 만기가 돌아오는 대출채권 규모만 1조 7156억 원이다. 만기 도래 시 대출 조건을 비슷하게 설정해 계약을 이어가는 게 관례였다. 하지만 대주주의 자구 노력이 미흡하면 산은이 여신을 지렛대 삼아 자구 노력을 추가로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
석유화학 기업에 대한 은행권 금융 지원을 결정하는 자율협의체에 산은이 포함돼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한 지점이다. 협의체는 채권자의 75%(채권액 기준) 이상의 동의를 얻어 자금 지원 여부를 결정하는 방식으로 운영될 예정이다. 석유화학 업계에 대한 은행권 전체 대출액(약 14조 원) 중 산은 몫이 40%가량인 만큼 금융 지원 과정에서 산은의 입김이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석유화학 업계 관계자는 “자구 노력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경우 산은이 개별 여신 중단 카드를 언제든 꺼낼 수 있다”면서 “산은이 특정 기업에 대한 자금을 줄인다는 얘기가 시장에 퍼지면 다른 금융기관에서 돈을 융통하기도 쉽지 않아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이미 채권단 사이에서는 석유화학 호황기에 대주주가 그동안 배당으로 받아간 금액을 감안하면 대주주의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정부 역시 대주주가 받아간 배당 금액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면서 석유화학 업계를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지난달 주요 석유화학 기업들에 나프타분해시설(NCC) 생산 감축 목표를 제시하면서 “지난 십수 년간 각 기업들이 13조 원을 배당으로 챙겨갔고 이 중 대주주 몫이 7조 원가량 된다”며 “금융권에서 일부 업체에 굉장히 안 좋은 시각을 갖고 있으며 이는 망하는 길로 가는 신호”라며 압박 수위를 높인 바 있다.
정부가 석유화학 업종에 이어 철강업에 대한 구조조정을 저울질하고 있는 만큼 산은의 보폭은 더 커질 수 있다. 철강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석유화학 업종에 제시했던 것과 유사하게 생산량 감축과 생산 시설 통폐합 등이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시장에서는 이 경우 산은이 개별 여신 거래를 예로 들면서 구조조정을 유도할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산은의 포스코·현대제철·동국제강 등 철강 업체 3사에 대한 대출 금액은 6일 기준 1조 8753억 원이다. 이 중 만기를 1년 안으로 남겨둔 채권만 1조 1531억으로 전체의 61.5%다. 기업별로 보면 현대제철이 9600억 원으로 가장 많고 동국제강(6900억 원), 포스코(2253억 원) 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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