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가 확장재정 기조를 앞세워 국고채 등 각종 채권 발행을 늘릴 것으로 보여 이재명 대통령 임기 내내 국내 채권시장은 살얼음판을 걷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정부가 예고한 내년 적자국채 110조 원과 보증채무 잔액 증가분 22조 원 외에도 3500억 달러(약 488조 원) 규모의 대미 투자 펀드 재원까지 마련하려면 채권 추가 발행이 불가피해 물량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장에서는 2022년 한국전력공사의 대규모 회사채 발행으로 국내 채권금리가 폭등했던 상황이 재연될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22일 기획재정부와 산업통상자원부 등에 따르면 정부가 추정하는 올해부터 2029년까지 5년간 반도체·2차전지·바이오·디스플레이 등 첨단산업에 대한 투자 수요는 약 388조 원이다. 여기에 약 100조 원 규모의 인공지능(AI)까지 합치면 총투자 규모는 500조 원에 육박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연간 100조 원 꼴이다.
이 같은 대규모 투자를 이끌어내기 위해 정부는 150조 원 규모의 국민성장펀드를 조성하고 이 가운데 75조 원은 산업은행에 신설하는 첨단전략산업기금을 통해 조달하기로 했다. 이 기금은 당초 50조 원에서 75조 원으로 증액됐다. 75조 원은 정부의 원리금 상환 보증을 바탕으로 채권을 찍어 조달한다. 당장 내년 발행 한도만 15조 원이다.
김정식 연세대 명예교수는 “민간 금융회사들이 몸을 사리니 첨단산업 육성을 위해 국책은행과 정부가 앞장서는 것에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면서 “다른 자금 조달 방안이 없다면 낭비하지 않고 효율적으로 쓰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확장재정을 천명한 새 정부가 부족한 재원을 충당하기 위해 내년 110조 원의 역대급 적자국채를 찍기로 한 가운데 정부 보증채까지 쏟아질 경우 채권시장에 상당한 압박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점이다. 영국·프랑스·일본 등 글로벌 주요 선진국처럼 우리나라도 재정적자 급증 우려로 국채금리가 급등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오는 상황에서 물량 폭탄까지 겹치면 장기금리가 상승 압력을 받을 수 있다.
정부 보증채도 마찬가지다. 2022년 한전이 에너지 가격 상승에 따른 수익성 저하로 필요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32조 원에 달하는 역대급 규모의 채권을 발행하자 한전채의 금리가 치솟은 바 있다. 2022년 초 한전채 3년물 발행금리는 연 2.1% 수준이었으나 그해 말에는 6%대까지 급등했다.
첨단전략기금산업채권과 같이 정부가 보증하는 최우량 특수채의 발행이 늘어나면 시중 유동성을 빨아들여 일반 회사채가 외면 받는 ‘구축 효과’도 나타날 수 있다. 사실상 돈이 떼일 우려가 없는 정부 보증채로 자금이 몰리고 이는 기업 채권 투자를 위축시켜 회사채의 금리를 밀어올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실제로 2022년 한전채가 쏟아질 당시 우량 회사채 지표로 활용되는 신용등급 ‘AA-’ 무보증 회사채 3년물 금리와 국고채 3년물 금리 차이(스프레드)는 1년 새 70bp가량 확대됐다.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펀드도 채권시장의 변수다. 투자 금액을 조성하기 위해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이 채권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연간 수조 원에서 수십조 원의 산은채·수은채 등 특수채 발행이 이어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투자금융 업계의 한 관계자는 “현재와 같은 금리 인하기는 채권시장에 호재이지만 물량 부담에 이를 소화하지 못하면 국고채·특수채·회사채 할 것 없이 모두 금리 급등으로 이어져 채권시장 불안을 가속화할 수 있다”고 전했다.
아직 시장 상황을 우려할 상황은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김기명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내년 첨단산업전략기금채권이 15조 원 발행돼도 은행권을 중심으로 한 수요가 견조해 발행금리 상승이 제한될 것”이라며 “2022년 당시 한전채 발행 급증으로 나타난 구축 효과가 발생할 확률은 낮은 것으로 판단한다”고 말했다. 기재부 관계자도 “내년 한국 국채가 세계국채지수(WGBI)에 편입되는 만큼 상당한 유동성이 시장에 유입된다”며 “이를 고려하면 국채나 정부 보증채 발행 물량 우려는 예상보다 크지 않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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