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과 손잡고 재생에너지 기반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를 짓기로 하면서 스마트그리드(지능형 전력망)가 핵심 기술로 떠오를 전망이다. 데이터센터에 대규모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려면 재생에너지의 불안정한 공급 문제를 해결하는 게 급선무이기 때문이다.
재생에너지는 일조량이나 풍량 등 날씨와 입지에 따라 공급이 불규칙한 데다 여러 곳에서 소규모로 생산돼서 수급 효율에 한계가 있다. 화력이나 원자력과 달리 발전량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어 생산되는 전기를 제때 사용하거나 저장해놓지 않으면 그대로 버려지는 문제도 있다. 재생에너지를 저장하려면 배터리의 일종인 에너지저장장치(ESS)를 써야 하는데 ㎿(메가와트)당 5억 원 정도로 비용 부담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불안정한 전력 공급은 데이터센터에 치명적이다. 데이터센터 정전은 그곳에 입주한 정보기술(IT) 기업 입장에서는 대규모 서비스 장애로 직결될 수 있어서다. 2022년 판교 데이터센터 화재로 카카오톡을 포함한 카카오의 대국민 서비스가 오류를 일으킨 사례가 대표적이다. 정전이 아니더라도 일시적으로 부족한 에너지를 급하게 충당하는 과정에서 전기료 부담이 커질 수 있다. 전기료 부담은 입주 기업 입장에서는 데이터센터 비용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서버 랙 10만 대 이상의 하이퍼스케일 데이터센터는 특히 한곳당 적어도 수백㎿(메가와트), 최근 그래픽처리장치(GPU) 도입에 따라 GW(기가와트·1000㎿) 단위의 대규모 전력이 필요해 흩어진 여러 재생에너지원을 효과적으로 모으고 관리하는 일도 필요하다.
스마트그리드는 전력 수급을 실시간으로 예측하고 효율적으로 배분해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할 것으로 기대된다. 태양광·풍력 등 에너지 공급과 데이터센터의 수요를 예측해 공급이 넘칠 경우 양방향충전(V2G) 기술로 다른 수요처에 분배해주고 부족할 경우에는 미리 추가 에너지원을 확보하는 식이다. 이처럼 전력 수급을 예측하고 중개해주는 IT 플랫폼 ‘가상발전소(VPP)’를 포함해 직류(DC) 전환, 배전망 관리도 스마트그리드 구현을 위한 핵심 기술로 꼽힌다.
전류는 직류와 교류(AC)로 나뉘는데 기존 화력 발전으로 만든 전기는 교류에 속한다. 반면 태양광은 직류를 생산하는데 이를 기존 교류 전력망에 그대로 흘려보내면 손실이 발생한다. 교류와 함께 직류도 함께 쓸 수 있는 전력망을 만드는 기술이 직류 전환이다. 특히 기존 교류 전력망은 화력 발전소에서 생산한 전기를 수도권 등 수요처까지 장거리·대규모로 보내는 송전망 위주였다면 재생에너지용 직류 전력망은 해안가 등에 잘게 흩어진 소규모 발전원을 효율적으로 연결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다.
기존 교류 전력망이 고속도로라면 직류 전력망은 복잡한 골목길들로 비유된다. 정부는 한국전기연구원 등을 통해 이 같은 골목길을 타고 흐르는 소규모 전류인 중전압직류(MVDC)를 기존 교류 전력망에 융합하는 사업을 추진 중이다. 이달 25일에는 한국전력이 LS일렉트릭, LG전자와 함께 재생에너지원을 활용한 직류 팩토리(공장)를 구축한다고 밝혔다.
이 같은 직류망을 관리하는 배전망 관리 기술도 필요하다. 직류망을 다시 골목길로 비유하면 기존 고속도로와 달리 교통 흐름이 복잡하고 불규칙하기 때문에 병목 현상이 발생할 수도 있다. 실제 직류망에서는 전력 과부하나 일시적 정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의미다. 정부는 2023년부터 2027년까지 3조 7000억 원을 투자해 AC·DC 하이브리드(혼합형) 배전망 기술 개발, V2G 제도와 한국형 VPP 도입 등을 목표로 하는 ‘제3차 지능형전력망 기본계획’을 추진 중이다. 이와 관련해 광주과학기술원(GIST)은 24일 ‘전력망 연구센터’를 개소했다. 광주·전남 지역을 실증 거점으로 삼아 분산에너지, 전기차 충전, ESS 등 차세대 전력망 핵심 분야를 연구할 방침이다.
한편 데이터센터 입지 문제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재생에너지 특성상 데이터센터를 발전원 근처인 지방에 지을 수밖에 없다. 반면 데이터센터 수요 기업이나 그들의 서비스 이용자는 수도권에 몰려있어 운영상 비효율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이에 이용자용(B2C) 서비스 운영에 필요한 데이터센터는 수도권, AI 학습에만 쓰여 고객과 근접할 필요가 없는 데이터센터는 지방에 두는 식의 전략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의 조언이다. 조성범 GIST 특임교수는 “중국은 화력 발전소가 많은 동부에서는 서비스용, 친환경 발전소가 몰린 서부에서는 학습용으로 데이터센터를 짓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급증하는 데이터센터 소비전력 자체를 감당하려면 원자력과의 에너지믹스 전략도 필수라는 게 업계 전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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