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대표 의료 인공지능(AI) 기업인 루닛(328130)이 10~15% 규모의 인력 구조조정을 단행한다. 대규모 연구개발(R&D) 투자로 매년 수백억 원의 적자를 내오던 루닛이 비용을 줄이고 ‘이익을 내는 기업’으로 탈바꿈하기 위해 칼을 빼든 것이다. 만성 적자에 시달리며 ‘법인세차감전계속사업손실(법차손) 규제’ 영향권에 놓인 국내 AI 영상진단 업계에 구조조정의 신호탄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박현성 루닛 최고재무책임자(CFO) 상무는 2일 “권고사직을 통해 전체 인력의 10~15% 가량에 대해 인력 조정을 진행한다”며 “내부 인력을 영업 부문으로 재배치하는 등 조직 효율화도 병행해 2027년 유의미한 손익분기점(BEP)을 달성하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루닛의 매출은 매년 성장하고 있지만 영업적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흑자전환을 위해서는 인력 구조조정과 효율화를 통한 비용 절감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박 상무는 “현재 인건비가 전체 비용의 60~70%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R&D 투자를 통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의료 AI 기업으로 자리잡았지만 이제는 성장에서 수익성으로 경영의 무게중심을 이동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실제 루닛의 인건비는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다.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영업비용 중 급여는 2022년 220억 원에서 2023년 226억 원, 지난해 390억 원으로 가파르게 늘었다. 루닛이 지난해 매출 542억 원, 영업손실 677억 원을 기록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인건비가 적자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셈이다. 영업손실 규모도 2023년 422억 원에서 지난해 250억 원 가량 늘었다.
의료 AI 선두기업발 구조조정은 관련 업계 전반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 의료 AI 기업 대부분의 재무사정이 루닛과 비슷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뷰노(338220)의 지난해 매출은 259억 원, 영업손실은 125억 원이었다. 임원을 제외한 뷰노 직원들의 연간 급여는 120억 원 수준이다. 지난해 100억 원 이상의 영업손실을 기록한 제이엘케이와 딥노이드(315640), 코어라인소프트(384470) 모두 직원 연간 급여 총액이 영업손실액의 약 50%를 차지했다.
AI 영상진단 기업들의 만성적인 적자는 구조적인 문제로 꼽힌다. 주력 제품인 영상진단 솔루션은 통상 정부의 신의료기술 평가 유예제도를 통해 비급여로 국내 의료 시장에 진입한다. 하지만 진료 현장에서 의료 AI를 활용하려면 의사들을 대상으로 의료 AI를 사용하도록 설득해야 하고, 환자들에게는 판독 비용을 비급여로 청구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수익을 만들어내기 쉽지 않은 구조인 것이다. 의료 AI 업계 한 관계자는 “AI 솔루션을 쓰려면 매번 환자·보호자 동의를 받아야 하는데 절차가 까다로워 실제 의료기관이 서비스 활용을 꺼리는 경우가 많다”며 “특히 응급 상황에서는 서류를 받는 절차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실 국내 보다 해외 시장 진출에 더 공을 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만성 적자에 시달리다 보니 최근 사업 재편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뷰노는 지난달 골 연령 분석 AI 솔루션인 ‘뷰노메드 본에이지’를 마이허브에 27억 원에 양도했다. 앞서 올 3월에는 코어라인소프트과 폐결절 검출 분석 AI 솔루션 ‘뷰노메드 렁씨티’를 30억 원에 매각하기도 했다. 현재는 기업-병원간거래(B2H) 사업이 아닌 만성질환 관리 의료기기 브랜드 ‘하티브’를 집중 육성하고 있다. 뷰노 관계자는 “키오스크 타입 심전도 측정 의료기기 ‘하티브 K30’의 핵심 시장은 관공서와 기업 현장”이라며 “수가 영향을 받지 않는 시장 위주로 진입하려 한다”고 말했다.
새로운 방식의 수익 창출에 나서는 곳도 있다. 국내 의료 AI 기업 중 최초로 반기 흑자 전환에 성공한 씨어스테크놀로지(458870)가 대표적. 웨어러블 AI 진단 모니터링 시스템인 ‘씽크’가 주력 제품으로, 올 상반기 매출 120억 원, 영업이익 9억 원을 기록했다. 이 회사는 AI 솔루션과 보험 수가를 연계해 병원의 사용 문턱을 낮췄다. 씽크를 이용할 때 환자는 직접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병원이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요양급여 수가를 청구하면 일부를 씨어스테크놀로지와 나눠 갖는 방식이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