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계 증권사 노무라증권이 삼성전자(005930)와 SK하이닉스(000660)를 향해 미국 관세 장벽 회피를 명분으로 2030년까지 120조 원을 현지에 투입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내놓아 파장이 일고 있다. 업계에서는 해당 보고서가 전제한 미국 수출 물량과 투자 시계열이 미국 현지 규제와 공사 여건을 무시한 비현실적인 내용이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일본이 반도체 산업 부활을 노리는 시점에 경쟁국인 한국 기업의 대규모 자금 유출과 생산 기반 이전을 압박하려는 의도가 깔린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21일 업계에 따르면 노무라증권은 19일 보고서를 통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2027년부터 본격적인 현지 공장 건설에 착수해 2030년까지 총 100조 원에서 120조 원을 투입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는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의 ‘미국 내 생산이 아닐 경우 100% 관세’ 압박에 대응하기 위해 양사 D램 생산량의 40%를 미국 현지에서 조달해야 한다는 계산에 근거한다. 노무라는 이를 위해 월간 웨이퍼 투입 기준 D램 29만 장, 낸드 13만 장 규모의 생산 능력이 필요하며 이는 삼성전자 평택 4공장(P4)의 두 배에 달하는 규모라고 분석했다.
미국 환경 규제·인력난 등 현실 외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투자 시계열 비판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투자 시계열 비판
업계에서는 노무라가 제시한 투자 시계열이 미국의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 탁상공론이라고 입을 모은다. 보고서는 2027년 착공해 2030년 가동을 전제로 하는데 3년 만에 평택 4공장 두 배 규모의 팹을 미국 땅에 짓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평가다. 국내에서는 지난한 인허가 과정을 거친 후에야 속도전을 펼쳐 3년 내 완공이 가능하지만 미국은 환경 규제와 허가 절차, 숙련공 부족 문제로 공사 기간이 한국보다 2배 이상 소요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실제로 TSMC의 애리조나 공장 모두 인력난과 비용 문제로 당초 계획보다 가동이 지연되고 있다.
투자 전제 조건인 대미 수출 비중 40% 역시 과도한 수치라는 비판이다. 한국무역협회와 산업통상자원부 자료를 종합하면 2024년 한국 반도체 총 수출액은 1419억 달러이며 이 중 대미 직수출액은 107억 달러로 7.5% 수준이다. 지난해를 봐도 총 수출 1734억 달러 중 미국행은 138억 달러로 8%에 그친다. 노무라 추산은 대만 등 제3국을 거치는 우회 수출 물량까지 모두 관세 대상에 포함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기정사실로 했다는 분석이다.
일본 자본의 ‘한국 흔들기’ 의구심
정부 차원 외교적 해법 모색 시급
정부 차원 외교적 해법 모색 시급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일본계 자본이 한국 반도체 산업을 흔들려는 의도가 다분하다는 의구심을 제기한다. 미국 정부와 협상 여지가 남아있는 상황에서 무리한 시나리오를 근거로 120조 원이라는 천문학적 비용 지출을 예고했기 때문이다. 보고서대로 투자가 집행될 경우 기업 수익성은 곤두박질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한국보다 공장 건설비가 30% 더 들고 운영비는 40%나 비싸다. 노무라 보고서 역시 이 경우 한국 생산 시 70%였던 영업이익률이 미국에서는 58%까지 떨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다만 한국과 중국, 미국 팹을 모두 합산한 수치는 60%대 중후반을 유지할 것으로 봤다.
막대한 자금이 미국 공사판에 묶이고 수익성이 악화하면 국내 연구개발(R&D)과 설비 투자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우려도 나온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3년 안에 미국에 120조 원짜리 공장을 지으라는 것은 한국 반도체 기업이 큰 리스크를 지라는 것”이라며 “일본 증권사가 한국 기업의 리스크를 과대포장해 글로벌 투자 심리를 위축시키고 반사이익을 얻으려는 것 아닌지 의심된다”고 꼬집었다.
개별 기업이 대응하기엔 한계가 명확한 만큼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을 주문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정부는 이미 2000억 달러(약 295조 원) 규모의 대미 투자 펀드 등 협상 카드를 쥐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미국의 칩스법 보조금이나 관세 정책은 유동적”이라며 “정부가 외교 채널을 총동원해 무리한 현지 생산 요구를 차단하고 실현 가능한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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