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찾은 거제의 대우조선해양과 삼성중공업 조선소는 겉으로는 위기와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도크마다 건조 중인 선박이 들어차 있고 ‘안벽단계 작업(후반작업)’을 진행 중인 드릴십과 컨테이너선들 등으로 조선소 야드는 붐볐다. 백인 엔지니어들뿐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외국인 노동자들까지 작업복을 입고 오가는 모습이 쉽게 눈에 띄는 점은 세계적인 조선업의 도시다웠다.
하지만 이는 거제의 ‘현재’일 뿐이다. 수주잔액이 떨어져가는 양대 조선소에 곧 닥쳐올 위기는 바닥부터 감지됐다. 거제도 바닥경기의 바로미터인 하청업체 부도율, 기간제 근로자 고용, 음식점, 원룸 임대 등에서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날 만난 삼성중공업의 선박블록 제작 협력업체에서 일하는 한 근로자는 “지난해만 해도 일이 밀려서 일주일에 3~4일 야근을 했지만 올 들어서는 일주일에 하루도 야근을 할까 말까 한 상황”이라며 “성동조선·대우조선 물량팀에서 일하다가 지난해 겨우 삼성중공업 하청업체에 취직했는데 일감이 줄고 있어 회사가 어떻게 될지 불안하다”고 말했다.
조선소 인력은 직영(정규직)-협력사(하청업체)-물량팀의 피라미드 구조로 운영된다. 물량팀은 협력사가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기간제로 고용한 인력들이다. 이런 구조 탓에 일감이 떨어지면 물량팀-협력사-직영 순으로 밑에서부터 인력 조정이 이뤄진다. 지금까지는 과거에 수주했던 선박 건조가 한창 진행 중이기 때문에 일부 인원들이 소폭 줄기는 했어도 대량 해고 사태가 일어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는 6월 이후 지금 조선소에 가득 차 있는 해양플랜트(드릴십·LNG설비 등)들이 하나둘씩 선주사에 인도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플랜트마다 약 1,000~3,000명의 작업인원이 매달려 있는데 그동안은 한 프로젝트가 끝나면 다음 프로젝트로 인력이 ‘릴레이’됐지만 이제는 후속 일감이 없어 인력이 뭉텅이로 빠져야 한다. 현시한 대우조선해양 노조위원장은 “6월 이후 후속 수주 선박이 없으면 사내 하청업체와 물량팀 노동자들부터 거리로 나오는 상황이 올 것”이라고 우려했다. 대우조선해양과 삼성중공업 노조는 6월부터 내년까지 약 2만명 이상의 대량 해고 사태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하청업체의 경우 벌써부터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대우조선해양의 경우 지난해 15군데가 넘는 하청업체들이 폐업했다. 올 들어서도 벌써 다섯 군데가 문을 닫았다. 하청업체들이 무너지면서 임금을 제대로 못 받은 직원들의 체당금 신청이 급증하고 있다. 고용노동부 통계를 보면 통영고용노동지청에서 지급된 체당금이 올해 1,205명, 48억원에 달한다. 지난해 같은 기간(501명·28억원)에 비해 두 배 이상 늘었다. 이 수치는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대우조선해양 노조에 따르면 대우조선해양 하청업체의 경우만 해도 부도 위기, 폐업 등으로 42개 기업에서 120억원의 임금 체불이 발생한 것으로 파악됐다. 김승보 대우조선 협력사협의회 회장은 “협력사들의 어려움이 시작됐다”며 “원청이 하루빨리 정상화되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선박블록 및 선박파이프 등을 생산해 납품하는 업체들이 몰려 있는 한내공단과 성내공단도 지난해부터 인원이 크게 줄었다.
그러나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대우조선과 삼성중공업은 올 들어 한 척도 수주하지 못했다. 삼성중공업은 수주잔액이 2008년 약 1,042만 CGT로 3~5년치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현재는 472만 CGT로 2년치 물량도 안 된다. 이 상태라면 내년 하반기부터 도크가 하나둘씩 비게 된다. 삼성중공업 노동자협의회 관계자는 “지난 2~3년간 조선업이 안 좋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 중소형 조선사 얘기라고 생각했다”며 “그러나 지난해 대규모 적자를 내고 수주도 뚝 끊기다 보니 이제 위기를 실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거제시 경기도 시나브로 타격을 입고 있다. 거제도 인구 26만명 중 3분의2가 조선업 관련 종사자와 가족들이기 때문이다. 이미 특근비·성과급이 줄면서 소비자들도 지갑을 닫는 중이다. 대우조선해양 옥포 조선소 앞에 음식점과 술집이 모여 있는 번화가는 요즘 예전 같지 않다. 과거 금요일 저녁이면 오전3~4시까지 불야성이었지만 요즘에는 11시만 되도 손님들이 크게 준다. 옥포동에서 7년간 횟집을 운영한 한 사장님은 “회식도 줄고 직원들의 씀씀이도 줄면서 단가 횟집이나 고깃집들은 손님이 줄었다”며 “주변에서 문 닫은 횟집이 많다”고 말했다.
고용인원이 줄다 보니 원룸 경기도 하강 곡선이다. 외지에서 조선소 일자리를 찾아 들어온 인력과 유흥업소 종사자들이 주로 거제도의 원룸 수요자들이다. 그러나 기간제 근로자 고용도 줄고 유흥업소를 찾는 발길이 줄면서 원룸을 찾는 외지인도 줄었다. 거제시 쑥쑥공인중개업소 관계자는 “원룸 시세가 지난해에는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55만원선이었는데 지금은 45만원까지 내렸다”고 전했다. /거제시=이혜진기자 hasim@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