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미국은 세계 각국의 ‘무역’에 대해 슈퍼 301조(포괄무역경쟁력법), 불공정무역의 예시 등을 들어가며 예민하게 반응했지만 ‘환율’에 대해서는 말을 아껴왔다. 미 재무부가 지난 1988년부터 의회에 제출하는 반기 환율보고서를 통해 환율조작국을 비판했지만 ‘정치적 수사’에 그쳤다. 그런 미국이 본격적으로 환율을 문제 삼고 나섰다. 외환시장 개입을 국내총생산(GDP) 대비 2% 이상 하지 말라는 등 계량적 수치까지 들고 나오며 세계 각국을 압박하고 있다. 그리고 예비 타깃으로 한국을 지목했다.
미 재무부는 지난달 29일(현지시간) ‘주요 교역 대상국의 환율정책 반기보고서’에서 “한국·중국·일본·독일·대만 등 5개국을 ‘환율관찰대상국’으로 지정했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최악의 경우 해당국 기업의 미 정부조달시장 참가가 금지되고 국제통화기금(IMF) 등으로부터 압박을 받을 수 있는 ‘심층분석대상국’ 지정 요건을 공개했다. 사실상 ‘환율조작국’인 심층분석대상국은 △연간 대미 무역흑자가 200억달러를 넘고 △GDP 대비 경상수지 흑자가 3%를 초과하며 △외환시장에서 달러 등 외화를 GDP 대비 2% 이상 순매수하는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나라다.
한국은 이 중 대미 무역흑자·경상흑자 등 두 가지 기준에만 들어가 환율조작국의 전 단계 격인 관찰대상국이 됐다. 한국의 지난해 대미 무역흑자는 228억3,000만달러로 기준보다 28억3,000만달러 많았으며 GDP 대비 경상흑자도 7.7%로 기준치를 훌쩍 넘었지만 외환시장에서 사들인 외화 규모가 GDP 대비 0.2%에 불과했다. 중국·일본·독일도 대미 무역흑자·경상흑자가 기준치를 초과해 관찰대상국이 됐으며 대만은 경상흑자, 외환시장 개입이 기준치를 넘어 관찰대상국에 지정됐다.
미 재무부는 한국에 대해 “외환시장 개입을 무질서한 금융시장 환경에 처했을 때로 제한하고 외환정책의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고 촉구했다. 또 “관찰 5개국의 경제·외환상황을 면밀히(closely) 모니터링하겠다”고 천명했다. 반기에 한 번씩 내는 보고서를 통해 각국을 철저히 감시하고 여차하면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겠다는 의미다.
환시 개입 규모만도 GDP 대비 2%를 넘으면 환율조작국이 되는 우리 외환당국은 향후 운신의 폭이 크게 제한될 것으로 보인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향후 원화강세에 대응한 당국의 개입 여력이 떨어질 수 있다”며 “이는 추세적 원화강세로 연결돼 수출에 부담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이번 보고서가 ‘한국판 플라자합의’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은 1985년 플라자합의에 따른 추세적 엔화강세로 수출이 감소하고 국내 기업이 해외로 이전하는 ‘산업 공동화’를 거쳐 잃어버린 20년을 맞았다. 우리도 추세적 원화강세를 막지 못해 일본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의미다.
/뉴욕=최형욱특파원 세종=이태규기자 choihuk@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