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유전자만을 잘라 교정하는 ‘크리스퍼(CRISPR) 유전자 가위’ 기술은 각종 질병의 근본적인 치료는 물론 특정 기능이 향상된 동식물 등도 만들 수 있어 인간의 미래를 확 바꿀 신기술로 각광받고 있다. 이 크리스퍼 기술을 이용해 인간 세포의 유전자 교정이 가능함을 처음 입증한 사람이 한국의 김진수 기초과학연구원(IBS) 유전체교정연구단장이다. 김 단장은 자신이 설립한 바이오 기업 ‘툴젠’을 통해 유전자 가위의 상용화를 추진해왔다. 지금은 툴젠 대표에서 물러나 유전자 가위 기초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하지만 12일 서울대 연구실에서 만난 김 단장은 우리나라 유전자 가위 기술의 미래를 묻는 질문에 “안타깝다”는 말부터 시작했다. 한국 유전자 가위 기술의 개척자 가운데 한 명인 그는 인터뷰 내내 격정적으로 토로했다. 김 단장은 “유전자 가위라는 기초기술이 열매를 맺으려면 앞으로 5~10년간 집중적인 투자가 필요한데 투자와 사업화가 착착 이뤄지는 미국·중국 등에 비해 우리는 자금력과 인프라 부족으로 어려움이 많다”고 전했다.
실제 툴젠의 가장 큰 경쟁사로 꼽히는 미국의 인텔리아와 에디타스는 올해 초 나스닥에 상장해 현재 시가총액이 1조원에 근접했다. 인텔리아와 에디타스는 김 단장과 함께 크리스퍼 기술을 선도하고 있는 미국 UC버클리와 MIT로부터 각각 특허 라이선스를 받은 기업이다. 반면 툴젠은 코스닥시장 진입조차 못하고 있다. 한국거래소로부터 지난해 12월과 올 5월 취약한 경영권, 특허등록 불확실성 등을 이유로 두 차례나 상장을 거부당했기 때문이다. 김 단장은 “인텔리아가 특허 미등록 상태에서 나스닥에 상장한 것을 감안하면 한국거래소의 처분은 아쉬운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자금력 부족은 특허경쟁에서 뒤처지는 원인이 되고 있다. 현재 MIT와 UC버클리는 미국 특허 독점권을 차지하기 위해 상호 특허 무효 소송을 벌이고 있다. 특허 독점권을 인정받으면 특허 사용료만으로도 막대한 수익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김 단장은 “특허경쟁에서 이기려면 우리도 관련 소송에 들어가야 한다는 지적이 많지만 최소 100억원이 넘을 소송비용 때문에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자금이 부족하다 보니 치료제 개발을 위한 임상시험 등에도 제약이 따른다.
김 단장은 “높은 규제 벽도 아쉬운 부분”이라고 말했다. 미국·유럽·일본 등은 유전자 기술을 활용한 치료제를 개발하는 데 특별한 법적 규제가 없지만 우리나라는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 ‘현재 치료법이 없는 분야’ 등 외에는 불허한다. 미국과 중국은 대대적인 규제 완화, 원활한 자금조달 등에 힘입어 올해 크리스퍼 기술을 이용한 치료제의 임상에 돌입하는 등 속도를 내고 있다. 우리는 전임상 단계가 고작이다.
김 단장은 “유전자 가위를 적용할 수 있는 분야가 광범위해 윤리적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최소한 ‘치료’ 분야에서는 규제를 풀어줘야 하는 게 아니냐”며 “우리의 크리스퍼 기술은 에이즈와 항암 치료를 위한 면역세포 표적 유전자를 90% 이상 제거할 수 있음을 확인했으며 다양한 유전질환에도 활용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규제가 계속되면 선진국에서 혁신적인 제품을 개발한 후에야 이를 쫓아가는 과거의 우를 반복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서민준기자 morandol@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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