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고급 한정식집은 지난해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시행 이후 ‘5만원권 기프트카드’를 만들어 팔고 있다. 기업 관계자가 공직자와의 식사 자리에서 이 기프트카드를 선물하면 산술적으로 8만원의 식사를 할 수 있다. 김영란법을 교묘히 피해 식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꼼수’인 셈이다. 이를 빗댄 모바일 외식상품권 판매 서비스도 등장했다. 선불카드 꼼수는 골프장에서 등장했다. 법인카드로 선불카드를 구매한 뒤 이를 통해 결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결제 당일 영수증이 발부되기 때문에 접대를 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선불카드가 아니어도 법망을 피하는 꼼수는 많다. 이미 공직사회에서는 밥값을 여러 차례로, 혹은 여러 개로 나눠 계산하는 이른바 ‘쪼개기’ 결제가 유행한다. 사실상 김영란법이 무용지물이 됐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바로 이런 꼼수 때문이다.
하지만 농가의 시름은 여전하다. 경기도 화성에서 30년째 호접란을 재배해오고 있는 세제난원의 박정근(55) 대표. 그는 스스로를 ‘뇌물생산자’로 지칭했다. 그는 “상례적으로 이뤄지던 관혼상제를 규제하는 게 말이 되느냐”며 “국민들 ‘힐링’에 도움을 준다는 자부심으로 여태껏 살아왔는데 김영란법이 순식간에 난 농가를 뇌물생산자로 전락시켰다”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의 상처도 상처였지만 당장 생존이 문제였다. 세제난원의 연간 호접란 출하량은 평균 30만분. 박 대표는 김영란법 시행 이후 출하량을 20만분으로 감산했다. 승진이나 개업 등 축하 선물의 단골 메뉴였던 난 수요가 급감했기 때문이다. 그는 “전국 호접란 농가가 110여개가량이었는데 김영란법 시행 이후 11개가 문을 닫았다”며 “출하량이 대폭 줄었는데도 도매가격은 여전히 오르지 않고 있다. 이런 식이면 나도 버틸 수가 없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타격을 입기는 다른 화훼 농가도 마찬가지다. 한국화훼협회에 따르면 김영란법 시행 후 협회 소속 화훼 농가 매출은 시행 전에 비해 평균 35%가량 주저앉았다. 협회가 지난 11일 문재인 대통령 앞으로 성명서를 내고 “농업인과의 약속을 반영해 김영란법 등 서민을 위한 법 개정에 적극 힘써달라”고 요구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한우 농가의 피해도 극심하다. 수요가 줄자 한우 가격이 뚝 떨어졌다. 축산유통종합정보센터에 따르면 김영란법 시행 직전인 지난해 9월27일 676만6,000원(600㎏ 기준)이던 한우 경매 시장 농가 수취가격은 이달 26일 570만2,000원으로 15.7% 급락했다. 인삼도 매출이 큰 폭으로 뒷걸음질했다. 인삼농협에 따르면 김영란법 시행 후 첫 명절이던 올 설 연휴 매출은 지난해 설 연휴와 비교했을 때 23.3% 감소했다.
어촌도 김영란법의 타격을 피해가지 못했다. 대표적인 예가 한우와 함께 고가 상품으로 꼽히는 굴비다. 법 시행 이후 롯데백화점에서 팔려나간 굴비는 전년 동기 대비 8.5% 줄었다.
문제는 정부의 일방적인 김영란법 시행에 따른 피해를 이들이 고스란히 감내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가장 큰 피해를 입은 화훼 농가 사례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박 대표는 “농림축산식품부에서 김영란법에 따른 화훼 농가의 피해가 1,300억원가량이라고 추정했다. 국회에서 공청회를 할 때도 폐농지원하라고 했지만 누구도 얘기를 들어주지 않았다”며 “헌법에 국가가 국민의 재산을 보호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는데 이게 국가가 할 일이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이어 “정부를 상대로 행정소송 등을 준비하기도 했지만 김영란법에 따른 피해를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막대한 소송 비용을 혼자서 감내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 때문에 결국 이마저도 포기해야 했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서 농축수산물을 김영란법의 예외로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문 대통령도 올해 1월 경북 구미를 찾아 “김영란법이 우리 사회를 조금 더 맑고 깨끗하게 만들기 위한 법인데 실제로는 오히려 서민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특히 선물을 5만원으로 규제했는데 농축수산물의 경우에는 그 5만원이라는 규제를 지키기에 어려움이 많다. 농축수산물에 대해서는 예외를 인정하는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외식업계와 소상공인, 그리고 공연업계도 어려움을 호소하기는 마찬가지다. 소상공인연합회가 올 초 3,000개 전국 소상공인을 대상으로 경영실태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매출액이 2015년보다 감소한 소상공인은 전체의 55.2%나 됐다. 조사 대상의 53.3%는 김영란법 시행을 원인으로 꼽았다.
외식업계도 된서리를 맞았다. 한국외식산업연구원의 올해 3월 설문조사에 따르면 외식업 운영자의 73.8%가 매출이 감소했다고 응답했다. 평균 매출 감소율은 37%에 달한다. 일식당(-82.0%)과 한식당(-74.1%)은 직격탄을 맞았다.
공연업계에는 매출의 절반 이상이 기업 후원인 클래식 공연의 타격이 크다. 공연계의 한 관계자는 “기업들로서는 협찬·후원을 하고 받는 단체관람권을 고객에게 제공하는 것 자체가 법 위반 소지가 있기 때문에 제약이 크다”면서 “이 부분을 반드시 풀어줘야 한다”고 밝혔다.
/세종=김상훈기자 서은영·윤경환·박준호기자 ksh25th@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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