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을 비켜간 금융당국의 결정은 무엇보다 긴 호흡으로 이어져야 할 금융정책이 정권이 바뀌었다고 오락가락한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신청 증권사의 말만 믿고 투자한 해외 주주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한국의 금융정책이다. 여기에 똑같은 업무에 대해 은행과 증권으로 나뉜 업권에 따라 인가 지침이 다르고 같은 업권이어도 단위에 따라 기준이 다른 누더기 인가제도 역시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본지 10월18일자 1·3면 참조
1일 금융위원회 산하 증권선물위원회가 초대형 IB의 핵심인 발행어음 업무를 한투증권에만 허용한 것은 불과 1년 전과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다. 임종룡 전 금융위원장은 지난해 6월 증권 업계가 해외 금융시장에서 경쟁하기 위해 초대형 IB를 육성하는 것을 금융위의 중장기 핵심 과제로 추진했다. 최소 10조원 이상 자기자본을 보유해야 아시아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금융위는 고심 끝에 자기자본이 4조원을 넘는 증권사는 예금자보호법만 적용하지 않을 뿐 은행의 예적금과 유사한 발행어음 취급을 허용하겠다고 밝혔다. 또 자기자본 8조원 이상인 증권사는 고객예탁금을 통합해 기업금융에 운용하며 원금을 보장하는 종합투자계좌(IMA) 업무를 할 수 있도록 했다. 당시 정책을 입안한 금융위 고위관계자는 “증권사들이 덩치를 키우려 하지 않으니 고육지책으로 자기자본을 늘릴 수 있도록 인센티브를 부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이 정책은 ‘4조원·8조원으로 나눈 근거가 없다’며 또 다른 관치라는 비판을 받았으나 대형 증권사들이 서둘러 자본확충에 나서면서 1차 목표를 달성했다는 평가도 나왔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며 금융당국의 분위기는 바뀌었다. 금융위 민간자문기구인 금융행정혁신위원회의 윤석헌 위원장은 지난달 11일 기자간담회에서 “초대형 IB에 기업대출을 허용하는 것이 IB 육성에 도움이 될까 의문”이라며 “은행 업무를 하는 만큼 이에 걸맞은 자기자본 규제가 같이 가야 한다”고 말했다. 금융혁신위는 케이뱅크와 초대형 IB를 감독보다 금융정책이 우선시된 대표 사례로 꼽았다. 정무위원회 국감에서도 초대형 IB의 업무범위 확대(발행어음, 기업신용공여 100% 상향 등)가 건전성에 대한 기준 없이 결정됐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이에 대해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초대형 IB 인가 과정에서 대주주 적격성과 자본 건전성을 함께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한투증권의 발행어음 인가에도 기존 대주주 적격성과 함께 엄격한 건전성 기준의 잣대가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 초대형 IB 추진 증권사 중 유일하게 제재 전력이 없는 NH투자증권(005940)의 경우 부동산투자 등으로 올 상반기 채무보증이 3조5,560억원으로 가장 많았던 점이 걸림돌이 되지 않았냐는 관측도 나온다.
당장 대형 증권사들은 모아놓은 자본을 활용할 수 없게 되면서 비싼 덩칫값을 해야 한다. 자본의 효율성을 나타내는 ROE가 하락하며 주가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증권정보 업체인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초대형 IB 신청 증권사 가운데 한투증권만이 유일하게 ROE가 10%대를 넘었고 미래에셋대우와 NH투자증권은 9%, 삼성증권(016360)은 6%대로 나타났다. 반면 중소형 증권사인 키움증권은 20%, 자기자본이 3조원을 넘는 메리츠종금증권은 15%대다. 이는 대형사의 경우 순이익이 늘어도 자기자본 규모가 더 크기 때문이다. 금융당국의 정책 취지에 맞춰 대우증권을 인수하는 등 가장 선도적으로 자본을 늘린 미래에셋대우가 제일 큰 타격을 입은 셈이다. /임세원기자 why@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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