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2.0’ 시대에 유일하게 한국이 미국을 상대로 협상력을 가질 수 있다고 평가되는 ‘K조선’이 방산업 훈풍을 타면서 HD현대와 한화가 사업 확장에 팔을 걷어부쳤다. 필리핀 수빅 조선소는 미국 본토에서 떨어져 있으면서도 아시아에 주둔한 미 해군을 상대로 방산 수주를 할 수 있는 전략 자산으로 꼽힌다. 국내와 상대적으로 가까운 거리에서 기자재와 인력을 수급할 수 있다는 점도 유리한 요소여서 매력적인 매물로 꼽힌다.
10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HD현대와 한화그룹은 필리핀 아길라 수빅 조선소 매각 제안을 검토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미 필리 조선소에 이어 수빅 조선소도 두 기업에 인수 제안이 갔다”고 전했다.
필리 조선소의 최대 강점은 미국 본토가 아니면서도 미 해군 함정 유지·관리·보수(MRO)사업을 수주할 수 있다는 점이다. 수빅은 과거 미 해군이 주둔했던 곳으로 현재는 필리핀 해군의 수리를 위한 기지로 활용되고 있으며, 미 사모펀드(PEF)운용사인 케르베로스가 경영권을 갖고 있다. 업계에서는 한화오션(042660)이 호주 오스탈 조선소 인수를 추진하는 배경에 오스탈의 미국 내 조선소 자산을 눈여겨 본 것과 마찬가지로, 수빅 조선소 인수를 통해 미국발 수주를 늘릴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글로벌 PEF 관계자는 "HD현대는 미 국방부 측과 소통하고 있으며, 동남아 우수 조선소를 인수해 MRO와 선박용 블록 생산 기지로 활용하려는 구상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HD현대는 이미 수빅 조선소에서 필리핀 군함에 대한 MRO 활동을 지원해왔고, 지난해에는 해상 풍력 하부 구조물 사업도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같은 업종에서 펼치는 두 그룹의 다른 전략도 주목 받고 있다. 한화는 적극적인 기업 인수와 투자 행보를 보이는 반면, HD현대는 상대적으로 투자보다는 개별적인 협업에 무게를 싣고 있다. 두 그룹은 과거 각자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추진했지만, 결과적으로 2023년 한화가 인수해 한화 오션으로 출범했다. 이 시점부터 두 그룹의 경쟁 구도가 한층 강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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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계 관계자는 “한화는 인수합병(M&A)을 통해 그룹이 성장했고, 방산 자체가 메인이기 때문에 미 함정 MRO 수주 확대를 위해 한화오션에서 적극적으로 투자를 추진하고 있다”면서 “HD현대는 일반적인 조선이 주축이고 방산은 그 중 일부인데다, 그룹의 문화도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신중하게 따지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HD현대중공업은 지난해 4월 미 필리조선소와 MRO사업을 위한 업무협약(MOU)를 체결했지만, 올해 1월 한화오션이 필리조선소를 인수하는 바람에 빛이 바랬다. 그러자 HD현대중공업은 이달 8일 미국 최대 규모인 헌팅턴잉걸스 조선소와 기술 협력을 체결했다.
한화는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유상증자를 통해 해외 방산과 조선 기업 인수에 총 2조 4000억 원을 투입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이중 8000억 원은 필리조선소 확장과 추가 조선소 확보에 쓸 예정이다. 당초 유상증자 신고서에 자금 사용 계획을 불분명하게 작성한 것도 추가 M&A를 염두에 뒀기 떄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한화오션은 지난달 미 해군의 군수지원함 ‘월리 시라’에 대한 MRO를 마치고 인도했다고 밝혔다. 국내 조선업체의 첫 미 함정 MRO 사업이다.
반면 HD현대는 실질적인 수주량 확보에 나섰다. 울산조선소에 미 MRO 사업용 도크를 배정하고 연간 2조원 수주 목표를 세웠다. HD현대중공업은 미국과 같은 성능의 이지스함을 직접 설계, 건조하는 국내 유일 조선사다. 한국 해군이 보유하게 될 6척의 이지스함 중 5척도 직접 건조하고 있다. 함정 건조에서 가장 어렵다고 평가되는 이지스 전투체계까지 통합할 수 있는 ‘전투체계통합팀’을 국내에서 유일하게 운영 중이다. 최근에는 미 함정 건조시장 개방에 앞서 이지스함 생산 능력 확대 등에도 나설 방침이다. 미국과 협력이 본격화된다면 한 해 5척까지 건조가 가능 하다는 게 HD현대중공업의 설명이다.
두 그룹이 국내에서 추가 투자에 나설 가능성도 거론된다. 두 그룹은 SK에코플랜트의 해상풍력 하부 구조물을 제조하는 오션플랜트의 인수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그 밖에 한화에어로스페이스에 남품하는 방산부품기업 엠앤씨솔루션 역시 한화가 인수 후보로 올라있다.
HD현대 역시 최근 IMM크레딧솔루션, NH투자증권을 통해 6000억 원의 교환사채(EB)를 발행하면서 △친환경 선박 개발 △자체 엔진 생산 능력 강화를 위한 투자 △동남아 우수 조선소 인수 등에 투입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HD현대가 현재는 한화그룹에 비해 투자에 신중하지만 중장기 매물로 나올 수 있는 국내 대형 방산·해운 기업에 전격 인수를 추진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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