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사들이 제품 수요 감소에 따른 유동성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회사채에 이어 기업어음(CP)까지 확대 발행하며 단기 유동성이 위협을 받고 있다. 지난 1·4분기 주요 정유사들의 합계 영업손실액이 3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되는데다 정유사들의 신용등급도 꾸준히 떨어져 자금 조달 여건이 악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18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한 유가로 수익성이 악화하며 전기차 배터리나 고부가가치 화학 제품 등의 미래 산업 투자는 엄두도 못 낼 상황이 지속되고 있어 교통·에너지·환경세(교통세) 부담 경감 등 정부 지원이 절실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부 정유사들은 CP를 발행해 환경세를 내야 할 판이라고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16일 에너지 업계에 따르면 국제 신용평가회사 무디스는 SK이노베이션(096770)과 SK종합화학의 신용등급 전망을 이날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하향 조정했다. 한국기업평가 또한 지난 13일 SK에너지와 에쓰오일의 무보증사채 등급 전망을 ‘AA+’에서 ‘부정적’으로 낮췄다. 정제마진이 마이너스로 유지되고 있는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정유사들의 영업손실 추정치가 조(兆) 단위까지 치솟은 것이 원인이다. 수요감소에 따른 원유 가격 하락 추세가 계속 이어지는 점도 정유사에 큰 부담이다. 서부텍사스산원유(WTI)는 15일(현지시간) 전날 대비 1.2% 하락한 배럴당 19.87달러를 기록해 18년 만에 20달러대가 무너졌다.
최근 몇 년간 미중 간 무역분쟁으로 ‘보릿고개’를 보낸 정유사들은 올 들어 단기 유동성 악화로 몸살을 앓고 있다. 지난달만 해도 SK이노베이션이 8,750억원, 현대오일뱅크는 7,800억원의 CP를 각각 발행하며 유동성 확보에 나섰다. CP는 회사채와 달리 이사회 의결 없이도 발행할 수 있지만 회사채 대비 금리가 다소 높아 대기업들이 이같이 대규모 CP 발행에 나선 것은 그만큼 자금 사정이 좋지 않다는 신호다. 한 정유사 관계자는 “생산한 지 두 달이 지난 항공유는 폐기처분해야 하는데 코로나19에 따른 항공유 수요 급락으로 재고 비용 부담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며 “차량 이동 감소로 휘발유 가격은 원유보다 낮아졌으며 경유 등 주요 제품 수요도 모두 급감해 공장을 가동할수록 손해가 누적되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응해 대형 정유사들은 정기보수 시기를 당기거나 일정을 늘리는 방식으로 재고 소진에 주력하고 있으며 일부 업체는 공장 가동률을 30% 수준까지 떨어트리는 고육책까지 쓰고 있다.
정유사들의 미래 먹거리 사업 또한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활로가 보이지 않는다. SK이노베이션이 육성 중인 전기차배터리의 경우 수조원의 대규모 설비투자를 바탕으로 완성차 업체의 주문을 수주해야 하지만 유럽 자동차 공장의 셧다운이 계속되는 현 상황에서는 기존 투자 계획 이행마저도 버겁다. 중국의 자국 배터리 기업 대상 보조금 지원 정책기간 연장과 각국의 환경규제 완화 기조 등 배터리 시장 전망이 이전 같지 않은 상황이라 자금 조달도 힘들다. ‘정유에서 화학으로(Oil to chemical)’의 사업전환을 목표로 나프타분해시설(NCC)이나 올레핀 생산 시설 건설에 막대한 투자를 진행해 온 GS(078930)칼텍스·에쓰오일·현대오일뱅크 또한 파라자일렌(PX) 등 화학 중간재 수요 감소로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이에 따라 지금까지 흑자기조를 유지하던 각 정유사의 화학 사업도 올 1·4분기에는 적자로 돌아설 것으로 전망되며 2·4분기에는 손실 규모가 더욱 커질 것으로 우려된다.
정부는 이와 관련해 경유와 휘발유 등에 부과되는 이달치 교통세 납부 기한을 몇 달 늦춰주는 방안을 검토중이만 관련 안이 시행된다 하더라도 애초 업계가 요구한 ‘석 달치 교통세 6개월간 납부 유예’와는 간극이 크다. 정유사에 부과되는 세금 체계를 손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교통세는 휘발유의 경우 ℓ당 529원, 경유는 375원이 각각 정액 형태로 부과되는데 정유사가 공장 출하시 세금을 미리 납부하고 각 주유소 등에서 제품이 판매되면 이를 추후 회수하는 구조라 정유사 입장에서는 유동성 문제가 언제든 발생할 수밖에 없다. 정유 4사가 이달 내야 하는 관련 세금은 약 1조원 규모로 세금 납부 체계를 개선하지 않을 경우 경제위기 때마다 정유사의 자금 압박이 반복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양철민기자 chopi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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