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석유)의 시대는 저무는 것일까. 최근 한달 새 글로벌 석유사업자들은 ‘석유의 시대는 끝났다’는 한탄을 할 정도로 굴욕을 겪었다.
우선 지난달 31일에는 글로벌 상장사 중 시가총액 1위 자리에서 영원히 내려오지 않을 것 같던 사우디 아람코가 시가총액 2위 자리로 밀려났다. 곧 이어 2005년 2월부터 6년 6개월 동안 시가총액 1위 자리를 지키며 미국 대표기업으로 분류됐던 엑손모빌은 지난 24일 다우지수에서 퇴출됐다.
일단 이 두 사건은 모두 애플 때문에 발생했다. 애플은 지난달 31일 시가총액 1조8,400억달러를 기록하며 시가총액 1조7,600억달러에 그친 아람코를 제쳤다. 미국 30개 기업의 주가 평균을 통해 지수를 산출하는 다우존스는 애플의 액면분할 발표로 지수 변동 요인이 발생하자, 세일즈포스 등 IT 기업을 편입한 대신 엑손모빌을 제외시켰다.
업계에서는 이들 사건 발생에 애플이 ‘티핑포인트’ 역할을 하긴 했지만 결국 석유 산업의 위기를 잘 드러내는 사례라고 입을 모은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지난 2018년 기준 전세계 석유 수요는 도로수송(42.2%)이 1위를 차지했으며 이어 석유화학(18.3%)·빌딩 및 발전(12.3%)·항공 및 선박(12%)·기타(12%) 순이다. 이중 석유의 가장 큰 수요처인 도로수송은 내연기관 차량이 빠르게 전기차로 대체되며 수요 감소나 정체가 불가피 하다. 석유의 주요 수요처 중 하나인 화학산업 또한 ‘리사이클링’ 등 친환경 소비 확산으로 예전대비 위상이 위축된 상황이며 발전 부문도 태양광, 수소 등의 친환경 에너지가 점차 대세로 자리잡는 모습이다.
1962년부터 무려 24년간 사우디 석유장관으로 일했던 자키 야마니가 “석기시대가 돌이 부족해서 끝난 게 아니 듯 석유시대도 석유 부족이 아닌 다른 이유 때문에 끝날 수 있다”고 경고한 것처럼, 석유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지금의 기축통화인 미국 ‘달러’를 있게 했던 석유의 시대는 정말 저무는 것일까.
석유의 종말.. 출구 찾는 정유사들 |
석유 시대 종말에 대한 우려는 국내 정유사들의 움직임만 봐도 알 수 있다. 국내 1위 정유사인 SK이노베이션(096770)은 10여년 전부터 전기차 배터리 부문에 강력 드라이브를 걸며 ‘딥체인지’를 시도중이다. SK이노베이션은 현재 LG화학·삼성SDI와 함께 ‘K배터리 빅3’ 업체로 분류된다. 에쓰오일과 GS(078930)칼텍스는 ‘석유에서 화학으로(Oil to Chemical)’의 사업 전환을 위해 석유화학 부문 설비투자에 수조원을 쏟아 붓고 있다. 현대오일뱅크는 롯데케미칼과 손잡고 석유화학 합작사인 ‘현대케미칼’을 설립하기도 했다.
다만 이 같은 움직임에도 이들 정유사들은 올 상반기에 최소 수천억원에서 최대 수조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하며 울상 지었다. 지난 4월 국제유가가 초유의 ‘마이너스’ 가격대까지 내려간데다, 이들 정유사의 핵심 이익 지표인 싱가포르 정제마진 또한 올들어 꾸준히 ‘마이너스’를 기록한 탓이다.
석유 가격 하락의 원인은 복합적이다. 미국의 셰일오일 채굴이 불러온 ‘공급과잉’ 등 산업적 요소와,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 등 주요 산유국의 증설 경쟁과 같은 정세적 요인이 얽혀 있다.
다만 석유가격 급등락은 이전과 같이 글로벌 경기 침체 및 상승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핵심 요소가 되지 못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미국이 2000년대 중반 ‘수압파쇄기법’과 ‘수평시추기술’을 적용해 셰일오일 채굴에 나서며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사우디와 러시아에 이어 세계 3위 석유 생산국이던 미국은 1위 석유생산국으로 올라섰으며, 트럼프 행정부 들어서는 석유 순수출국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미국 입장에서는 중동의 전략적 중요성도 덩달아 낮아졌다.
사우디는 최근 몇년간 증산을 통한 석유 공급 과잉을 주도하며 다시금 ‘오일 패권’을 쥐려 애썼다. 사우디는 배럴당 원유 생산 단가가 2~3달러에 불과해 러시아나 미국 대비 원가 경쟁력이 압도적으로 높지만, 국가 재정에서 차지하는 석유 의존도가 높아 유가 하락시 가장 타격이 큰 국가다. 사우디가 아람코 상장 자금을 바탕으로 IT 기반의 산업구조 전환을 추진하는 ‘사우디 비전 2030’에 힘쓰는 이유다.
실제 사우디의 이 같은 움직임에 국제 원유 가격이 셰일업체들의 손익분기점(BEP) 수준인 배럴당 50달러 밑으로 떨어지며 셰일업체들이 파산할 것이란 전망이 줄을 이었다. 반면 미국 정부의 자금 지원 및 셰일업체의 비용 감축 노력으로 현재 배럴당 44달러(두바이유 기준) 수준의 유가에서도 버티는 모습이다. 결국 다양한 공급 과잉요인에 산업구조 전환에 따른 수요 감소 요인이 더해져 지금의 ‘석유 종말론’으로 이어진 셈이다.
전기차와 재생에너지.. 석유의 종말 앞당기나 |
다만 발전소의 경우 최근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적은 액화천연가스(LNG) 발전 비중이 빠르게 늘고 있다. 애초 석탄발전 비중이 석유발전 비중의 10배 가량이다. 무엇보다 석유는 이산화탄소 배출 우려 외에도 석탄 대비 높은 원가 부담 때문에 향후 발전 시장에서 퇴출될 가능성이 높다. 유럽이나 중국 등은 원자력 발전소 설립에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어 발전 부문에서 석유의 위상은 갈수록 줄어들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는 ‘수소경제’ 활성화로 이전대비 훨씬 안정적 발전이 가능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지금까지 태양광이나 풍력 등은 특정 시기에만 발전이 가능해 에너지저장장치(ESS)에 과다 생산된 에너지를 저장하는 방식으로 운용 됐지만, ESS 저장용량 문제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반면 태양광 등에서 발생한 에너지를 ESS에 저장한 다음 이를 ‘물 전기 분해’에 활용해 고순도의 수소발전용 수소를 얻을 경우, ESS 용량 문제 등을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아직까지 수소경제 관련 인프라가 부족하긴 하지만, 각국의 투자 확대 여부에 따라 재생에너지 시장 확대 가능성이 높은 셈이다. 테슬라가 주도하는 전기차 시장과 현대차가 주도하는 수소차 시장 중, 어떤 형태의 자동차가 주도권을 쥐든 석유 사업자에게는 안좋은 시나리오가 그려지는 셈이다.
/양철민기자 chopin@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