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째 고기를 팔고 있는데 올해가 가장 힘드네요. 예년 설 명절 같았으면 다섯 근 넘게 사가던 단골손님도 올해는 달랑 한 근밖에 안 사가요.”
설 연휴를 사흘 앞둔 8일 서울 강남구 영동전통시장에서 만난 정육점 주인 최철한 씨는 가게 안에 앉아 멍하니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예년 같으면 설 대목을 앞두고 한창 바빠야 할 시기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시장을 찾는 손님들의 발길이 뚝 끊긴 탓이다. 이날도 오전 8시부터 일찌감치 가게 문을 열었지만 점심시간이 다 될 때까지 최 씨의 정육점은 고요한 적막감만 맴돌았다.
민족 최대 명절인 설날을 앞두고 대목을 기대해야 할 시장 상인들의 얼굴에 설렘 대신 걱정과 근심이 드리우고 있다.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설 연휴까지 5인 이상 집합 금지 조치가 연장되면서 설 특수를 기대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설 연휴를 앞두고 찾은 서울의 주요 전통시장에서는 코로나19로 고객들의 발길이 끊기고 구매 물량도 크게 줄면서 왁자지껄한 명절 대목 분위기를 느낄 수 없었다.
이날 서울 영등포시장도 명절을 코앞에 둔 시장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눈에 띄게 한산한 모습이었다. 시장을 찾는 손님이 없다 보니 상인들 대부분은 가게 안에 앉아 난로를 쬐고 있었다. 이곳에서 떡국 떡과 만두피 등 명절 음식을 파는 김 모(58) 씨는 “평소 명절 같았으면 하루에 스무 병씩 팔리던 식혜가 어제는 단 두 병밖에 팔리지 않았다”며 “경기가 좋지 않다 보니 만두소도 안에 넣는 재료의 가짓수나 양이 크게 줄어들었다”고 전했다. 근처 정육점 직원 이 모(40) 씨도 “원래 설을 앞두고 열 팩씩 나갔어야 할 LA갈비가 두 팩만 팔렸다”며 “코로나19로 식구들이 많이 모이지 못하니까 다들 음식을 조금만 장만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규모가 작은 동네 전통시장의 상황은 더 심각했다. 서울 관악구 인헌시장에서 청과물 가게를 운영하는 정 모(55) 씨는 “이곳에서 장사를 10년 넘게 해왔는데 지금이 가장 장사하기 어려운 것 같다”며 “지난해 설날과 비교하면 손님이 절반으로 줄었다”고 토로했다. 이웃 수산물 가게 상인 이 모 씨도 “원래 명절 기간에는 시장이 사람들로 가득 찼어야 하는데 올해는 그냥 평일 수준”이라며 “워낙 경기가 좋지 않은데다 재고 순환도 안 되다 보니 발주 물량을 예측하기도 힘든 상황”이라고 전했다. 서울 동작구 남성시장에서 명절 음식을 판매하는 이희진(70) 씨는 “지나가는 사람들은 많아 보여도 정작 사가는 양은 별로 없어서 가게 매출은 크게 줄어들었다”고 한숨 쉬었다.
다만 코로나19로 가족들을 만날 수 없다 보니 아쉬운 마음을 선물로 대신하려는 이들이 일부 눈에 띄었다. 남성시장에서 청과물 가게를 운영하는 이 모(43) 씨는 “예전처럼 가족들이 못 모이니 오히려 선물이라도 주고받으려고 과일 선물세트를 사가는 손님들이 적지 않다”고 전했다. 이러한 수요를 겨냥해 남성시장을 비롯한 일부 전통시장에서는 일정 금액 이상 구매 시 상품권을 증정하는 이벤트도 벌이고 있었다.
설 연휴를 앞두고 크게 오른 장바구니 물가는 시장을 찾는 이들의 지갑 열기를 주저하게 만드는 또 다른 요인이다. 서울시농수산식품공사에 따르면 올해 전통시장의 설 차례상 차림 비용은 21만 1,245원으로 지난해 설에 비해 13% 오른 것으로 조사됐다.
/심기문 기자 door@sedaily.com, 김태영 기자 youngkim@sedaily.com, 이덕연 gravity@sedaily.com, 정다은 downright@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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