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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지마 원칙주의'로 기업들 옥좨…"어느 나라 공정위냐" 산업계 한숨만

[View & Insight] 양철민 경제부 기자

글로벌 산업 재편에 경쟁 치열한데

공정위는 "불공정거래 규제" 고수

9일 대한항공-아시아나 결합 심사

알짜노선 반납 요구…시너지 반감

해운업계엔 900억대 '담합 과징금'

지원은 커녕 산업 경쟁력 발목잡아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TC)는 지난해 8월 ‘메이드 인 USA’ 라벨 규정을 개정했다. 지금까지 FTC의 미국산 제품 라벨 단속 권한은 지침(guidance) 수준이었지만 당시 개정으로 1건당 최대 4만 3280달러의 벌금 부과가 가능해졌다. FTC의 이 같은 움직임은 지난해 1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바이 아메리카’ 정책을 강화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한 것에 대한 후속 조치다. 자국 이익을 위한 미국 부처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다. 이를 통해 미국 정부는 자국 내 일자리 증가는 물론 자국 중심의 공급망 구축 방안에 속도를 낼 수 있게 됐다.

반면 한국의 FTC 역할을 하는 공정거래위원회는 미중 무역 분쟁과 코로나19에 따른 공급망 불안 및 경기 침체 속에서 ‘불공정거래 행위 규제’라는 원칙만 고집하며 한국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담당 부처인 해양수산부의 반대에도 해운 업체들에 900억 원이 넘는 과징금을 부과한 데 이어 플랫폼 산업 규제를 밀어붙이며 혁신 성장 스타트업들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업계에서는 ‘어느 나라 공정위냐’는 볼멘소리까지 나온다.





7일 관계 부처에 따르면 공정위는 9일 전원회의를 통해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간의 기업결합을 심사한다. 공정위는 앞서 이들 기업이 보유한 공항 슬롯(시간당 이착륙 허용 횟수)과 운수권(각국 정부가 자국 항공사에 배분하는 운항 권리) 일부를 반납하는 이른바 ‘조건부 승인’ 입장을 밝힌 만큼 전원회의에서도 이와 비슷한 결론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조건부 승인이 ‘규모의 경제’ 형성을 어렵게 해 결국 국내 항공 산업 경쟁력 저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특히 공정위가 앞서 대한항공 측에 발송한 심사 보고서에 따르면 ‘인천~LA·뉴욕·시애틀’을 비롯해 ‘인천~파리’와 ‘인천~바르셀로나’ 등 이른바 중복 ‘알짜 노선’을 반납하도록 해 합병의 시너지도 크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대한항공이 공정위의 조건을 받아들일 경우 대규모 인력 감축 및 투자 감축이 불가피하다. 지난 2018년부터 3년간 대한항공의 누적 당기순손실은 1조139억 원이며 아시아나의 누적 당기순손실은 1조 5168억 원에 달하는 상황에서 이익이 없는 합병을 성사시킬 만큼 한가하지도 않다. 무엇보다 주요 중복 노선을 반납할 경우 대형 비행기 운영 노하우가 부족한 국내 저비용항공사(LCC)가 이를 이어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외국계 항공사에 기회를 주며 우리 항공사의 글로점 점유율 하락이 불가피하다.

공정위가 지난달 부과한 해운사 과징금 962억 원에 대해 업계는 물론 해수부도 “실상을 모르는 조치”라고 반발한다. 공정위는 해운사들이 2003년 12월부터 2018년 말까지 총 120차례에 걸친 운임 담합을 한 만큼 과징금 부과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해운법 29조에 해운 업체 간 공동행위를 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는 데다 해수부에 몇 차례 신고까지 완료했다는 입장이다.



해운법과 공정거래법 사이의 법리 해석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는 공정위 결정은 최근 물동량 증가로 숨통이 트이고 있는 해운 업계에 치명타를 날렸다. 해운 시장에서는 화주와 선사 간의 ‘갑을 구조’가 확고한 데다 2017년 ‘한진해운 파산’ 사태에서처럼 대형 해운 업체 또한 언제든 무너질 수 있을 만큼 수익이 불안정하다. 이번에 과징금을 부과받은 국적선사 중 12곳의 컨테이너선 영업이익률은 2003년부터 16년간 연평균 -0.4%에 불과해 해운법이 명시한 공동행위가 불가피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여기에 해외 경쟁 당국이 한국 해운사를 상대로 과징금을 부과할 근거를 한국 경쟁 당국이 제시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조성욱 공정위원장이 공을 들이는 플랫폼 산업 규제는 스타트업들을 고사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 제대로 날개를 펼치지도 못한 채 규제에 억눌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 스타트업 관계자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 스타트업에 시장 지배적 지위로 규제를 한다면 누가 혁신 성장을 하겠느냐”고 반문한다.

공정위의 묻지마 원칙주의는 조선 산업 구조 조정을 망쳤다는 비판을 받는다.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 간 합병 실패가 유럽연합(EU) 경쟁 당국의 ‘불허’가 가장 큰 이유이기는 하지만 공정위가 3년 가까이 결론을 내지 못하며 ‘합병 여론’을 주도하지 못한 점도 원인이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이 같은 공정위의 ‘엇박자 행보’와 관련해 조 위원장 특유의 원칙주의를 배경으로 꼽는다. 서울대 교수 출신인 조 위원장은 과거 논문에서 재벌을 ‘성공한 맏아들’로 표현하며 더욱 엄격하게 법 집행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10월 해운 업체 담합 관련 국정감사에서 조 위원장은 “위법성이 인정되면 피심 기업의 재무 상태, 이익을 본 정도, 산업 특성 등을 종합 고려해 과징금 부과를 결정한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한 부처 관계자는“‘아메리카 퍼스트’ 기조를 이어가고 있는 미국과 자국 이익을 우선시하며 각종 불공정행위를 일삼는 중국 등만 보더라도 ‘원칙주의’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의문”이라며 “공정위원장 또한 대통령이 임명하는 정무직이라는 점에서 지금과 같은 글로벌 산업 급변기에는 다소 유연한 접근이 필요해 보인다”고 밝혔다.

양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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