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수준의 비상경영 체제 돌입에 나선 기업들이 ‘비상 선언’ 외에도 실제로 투자 축소, 사업 개편, 임원 임금 삭감 등 구체적인 허리띠 졸라매기에 나섰다. 개별 기업들의 투자 계획 재검토가 줄을 잇고 있다. 일부 기업에서는 ‘임금 삭감’이라는 궁여지책까지 꺼내 들었다. 5대 그룹의 한 최고경영자(CEO)는 “2008년 금융위기 충격이 올 수 있다”며 현재의 위기 상황을 전했다.
위기 장기화에 대비하기 위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등 주요 그룹 총수들은 해외 사업 현장을 찾아 사업 전략 재검토를 모색하고 있다.
◇총수 직접 나서 ‘위기 탈출’ 모색=29일 재계에 따르면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이날 경기 이천 LG인화원에서 열린 계열사 사장단 워크숍을 통해 국내외 경영 환경을 꼼꼼하게 점검하고 대응 방안 모색에 머리를 맞댔다. 구 회장과 사장단은 LG경제연구원의 현재 위기 상황 진단을 바탕으로 향후 사업 전략 재편 방향에 대한 대책을 강구했다.
다른 그룹 총수들도 발빠르게 움직이는 중이다. 복권 후 경영 보폭을 넓히고 있는 이 부회장은 최근 영국과 중남미 출장을 통해 현지 사업 현황을 점검하는 한편 복합위기를 돌파할 인수합병(M&A) 전략을 모색하는 등 대응 전략 마련에 골몰하고 있다. 반도체 시장 침체를 극복할 방안으로 영국 반도체 기업 암(ARM) 인수를 논의하기로 하는 등 투자를 통해 위기 극복 해법을 찾겠다는 모습이다.
현대차그룹의 정 회장은 미국 정부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대응을 위해 미국 출장길에 올랐고 SK그룹 최 회장도 안정적인 공급망 확보를 위한 해외 활동에 나섰다. 7월 ‘비상경영’을 선언한 롯데그룹의 신 회장은 인도네시아·베트남 현지 사업을 점검하며 대비책 마련을 시작했다.
◇위기 심화에 투자 축소, 임금 삭감까지=이 같은 총수들의 활로 찾기 총력전에도 불구하고 악화되는 경영 환경에 대응해 투자 감축이 속속 이어지는 모습이다. 삼성전자는 글로벌 복합 위기 가속화에 대응해 상당수 내부 미집행 사업을 보류·축소하기로 했다. 업계에서는 불필요한 지출을 감축해 대형 투자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경영 전략을 전환한 것으로 보고 있다.
SK하이닉스는 6월 글로벌 경영 불확실성 증가에 따라 4조 3000억 원 규모의 청주 공장 증설 투자를 전격 보류했다. 현대오일뱅크는 최근 이사회를 통해 3600억 원 규모의 상압증류공정(CDU)·감압증류공정(VDU) 설비 신규 투자를 전면 중단하기로 했다. 한화솔루션은 1600억 원 규모의 질산유도품(DNT) 생산 공장 설립 계획을 철회했다. 이밖에 비상경영 체제에 돌입한 포스코그룹은 8월 동국제강과 함께 브라질 CSP 제철소 지분을 아르셀로미탈에 매각하면서 부실 해외 투자 정리에 나섰다. 포항제철소 복구에 상당한 자금이 투입되고 현재 철강 가격 역시 생산원가까지 근접하면서 포스코그룹은 다음 달 회의에서 투자 계획 조정과 해외 법인 리스크 재점검 등에 나설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중공업그룹도 권오갑 회장이 7월 “각 사는 경영전략을 수시로 점검하고 필요하면 이를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고 밝히는 등 사업 재편을 검토하고 있다.
투자 축소를 넘어서 비용 감축을 위해 ‘임금 삭감’까지 추진하는 기업도 나타나고 있다.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의 지주회사인 한국앤컴퍼니는 4월부터 전 계열사 임원의 임금을 최대 20% 삭감하기로 했다.
◇석 달 새 환율 15% 급등, 경영 위기 장기화 우려=전시에 준하는 기업들의 비상경영 돌입은 대외 환경이 극적으로 변하지 않는 한 당분간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고물가·고금리·고환율 등 하나만 닥쳐도 심각한 경영 위기로 작용할 변수들이 연이어 터져 나오는 상황이어서 개별 기업이 대응하는 것은 불가능한 수준이다.
원·달러 환율은 6월 1252원에서 이달 28일 기준 1439원으로 14.9%(187원)나 급등했다. 기준금리는 미국의 연이은 ‘자이언트스텝(0.75%포인트 금리 인상)’ 여파로 계속 급등해 올 초 1.25%에서 2.5%까지 두 배나 뛴 상태다. 금리 부담이 급등하면서 대한상의 조사에서 기업 61.2%가 ‘고금리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응답하는 등 기업 부담이 치솟는 상태다.
업계 관계자는 “선제적인 대응이 어려울 정도로 대외 환경이 급변하고 있어 여기에 평시 수준으로 대응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이라며 “기업의 투자 위축으로 경기 불황이 길어지는 악순환이 나타날 수 있어 정부 등 다방면의 대응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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