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005930) 회장이 “투자에 흔들림이 있어서는 안 된다”며 반도체 위기를 정면 돌파하겠다는 뜻을 거듭 강조했다. 글로벌 반도체 위기가 짙어지는 상황에서 반도체 부문 경영진을 직접 소집해 ‘초격차’ 전략의 굳건한 추진 의지를 다시 한 번 드러냈다는 해석이 나온다.
18일 삼성전자에 따르면 이 회장은 전날 삼성전자 천안과 온양 사업장을 찾아 차세대 반도체 패키지 경쟁력과 연구개발(R&D) 역량 등을 점검했다.
이 회장은 천안캠퍼스에서 경계현 디바이스솔루션(DS)부문장(사장)을 비롯해 이정배 메모리사업부장, 최시영 파운드리사업부장, 박용인 시스템LSI사업부장 등을 불러 경영진 간담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이 회장은 “어려운 상황이지만 인재 양성과 미래 기술 투자에 조금도 흔들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최근 반도체 시장의 업황 부진이 이어지는 가운데 선제적인 투자로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기존 전략을 되새기면서 초격차를 위한 도전 정신을 일깨우려는 행보로 분석된다.
이 회장이 직접 둘러본 패키지 공정은 최근 글로벌 반도체 업계의 미세 공정 경쟁이 심화하며 중요성이 크게 높아지고 있다. 반도체 다운턴(하락 국면)으로 심각한 위기에 놓인 삼성전자가 ‘반격의 시발점’으로 패키지 분야를 택한 것으로 풀이된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에서 업계 1위인 대만 TSMC와의 격차를 좁히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삼성전자로서는 패키지 공정에서마저 뒤처지면 첨단 기술 경쟁에서 더 밀릴 수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국가적 지원을 받는 기업들과 경쟁하는 삼성전자로서는 한 발 앞선 기술을 확보하는 것이 유일한 대응책”이라며 “공격적인 투자와 인재 육성을 염두에 둔 전략적 행보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최근 현장 행보는 ‘미래 사업의 경쟁력 확보’에 방점이 찍혀 있다. 후발 주자인 반도체 패키지 분야에서는 추월 전략을, 선두인 디스플레이 분야에서는 ‘압도적 기술 우위’ 전략을 각각 제시했다. 경쟁 기업들이 투자를 망설이고 있는 지금이 시장 주도권을 일시에 뒤엎을 수 있는 적기라고 판단하고 망설임 없는 선제 투자를 주문했다는 해석이다.
◇반도체 역전 전략, 핵심은 ‘패키지’=이 회장은 17일 고대역폭메모리(HBM), 웨이퍼레벨패키지(WLP) 등 첨단 패키지 기술이 적용된 천안캠퍼스 반도체 생산 라인을 직접 살펴봤다.
이 회장이 직접 둘러본 천안·온양 사업장은 테스트와 패키징 등 반도체 후공정을 담당하는 곳이다. 패키지는 반도체 칩을 전자기기에 부착 가능한 상태로 만드는 공정이다. 팹리스(반도체 설계)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등 ‘전 공정’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외됐던 분야이기도 하다.
최근 회로 미세화의 한계에 다다른 글로벌 반도체 업체들은 이를 극복할 대안으로 첨단 패키지 기술에 주목하고 있다. 여러 종류의 반도체 칩을 기판에 효율적으로 담아 기술적 난제를 극복하는 첨단 패키지 역량이 반도체 업체들의 핵심 경쟁력으로 떠오르고 있다. 메모리를 넘어 시스템반도체에서 글로벌 1위로 도약하려는 삼성전자로서는 패키지 기술의 주도권 확보가 필수적이라는 게 업계의 평가다.
삼성전자는 후공정 분야에서도 업계 1위인 TSMC를 뒤쫓는 후발 주자다. TSMC는 방대한 후공정 생태계를 구축해 패키지 업계의 우위를 지키고 있다. 여전히 불리한 위치지만 당장 격차 극복이 쉽지 않은 파운드리에 비해 패키지의 추월 전략은 ‘해볼 만하다’는 판단이다. 과감한 선제 투자로 패키지 분야의 격차를 좁혀 TSMC의 우월한 지위에 균열을 만들고 패키지 경쟁력을 바탕으로 파운드리 분야에서도 역전을 도모하겠다는 것이다.
이 회장은 패키지 기술 개발 부서 직원들과 간담회를 갖고 헌신과 노력에 대한 감사를 표하면서 핵심 경쟁력 확보를 위한 부단한 노력을 당부하기도 했다. 직원들은 이 회장에게 개발자의 자부심, 신기술 개발 목표 등을 전했다.
◇디스플레이는 中과 격차 더 벌린다=이 회장은 ‘후발 주자’인 반도체와 달리 ‘선두 주자’인 디스플레이 분야에서는 굳건한 초격차를 유지하기 위한 전략을 모색했다. 이 회장은 7일 충남 삼성디스플레이 아산캠퍼스를 찾아 기술 우위 유지를 위한 임직원들의 노고를 격려했다.
삼성전자는 거대한 내수 시장을 바탕으로 국가적 지원까지 등에 업고 맹추격하는 중국 업체들을 뿌리치기 위해서는 ‘압도적’ 수준의 기술 격차를 내야 한다고 보고 있다. 과거 일본 업체들을 누르고 글로벌 디스플레이 업계 1위의 발판이 됐던 액정표시장치(LCD)는 가격 경쟁력을 앞세운 중국 업체들에게 시장을 거의 내준 상태다. 적당히 앞선 기술력으로는 시장 우위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이 회장의 디스플레이 현장 방문은 퀀텀닷(QD) 유기발광다이오드(OLED)를 중심으로 한 미래 디스플레이 산업의 주도권 확보를 적극 주문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OLED 분야에서는 아직 중국 업체들의 기술력이 한국을 따라오지 못하고 있지만 ‘가성비’를 앞세워 시장점유율을 높이고 있는 상태”라며 “새로운 폼팩터(제품 외형)나 압도적인 기술력을 내지 못하면 1위 시장을 또 한 번 중국에 내줄 수 있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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