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대구 혁신도시에 직장을 얻은 A씨는 요즘 부동산 앱을 보면 올 가을이 슬슬 걱정이 된다. 올 가을은 그가 가족들과 함께 이사오기 위해 구했던 30평 대 아파트의 전세 만기 시점이다. 3억 원 대였던 전세 시세는 당시보다 약 1억 원 가량 떨어졌다. 전세값 하락은 세입자에게 당연히 희소식이어야겠지만, 요즘 부동산 시장 분위기에선 꼭 그렇지만은 않다. 아파트라서 전세보증보험에 가입하지 않았기에 최악의 경우 집이 경매에 넘어가는 상황을 포함해 집주인과의 지리한 분쟁에 들어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반기 부동산 시장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가시지 않고 있다. 연초 거래가 늘고, 가격이 소폭 올라오면서 부동산 시장에 ‘그린 슈트(경제 회복 징후)’가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는 기대도 있다. 그러나 정부의 프로젝트파이낸싱(PF)에 대한 단기 연명 조처에도 분양시장이 살아나지 않을 수 있는데다, 무엇보다 ‘역전세’라는 뇌관이 도사리고 있다.
그나마 A씨와 같은 아파트 임차인들은 여러모로 상황이 낫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보증금은 돌려 받을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빌라 시장의 전세 임차인들은 더 큰 불안에 빠져 있다. 소위 빌라왕의 소유가 아니어도 상당수 빌라는 역전세의 시한폭탄이 째깍째깍 돌아가고 있다. 2021년 하반기 집값이 무섭게 치솟자 아파트 전세를 구하지 못했던 이들이 빌라 시장에서 목돈을 주고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떨어진 전세금을 내주지 못할 집주인들이 부지기수로 나타날 테고, 임차인들은 피 같은 보증금을 지키지 못할까 하루하루 불안에 떨어야 할 수 있다.
임대인과 임차인이 윈윈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국민들이 애용해 온 전세 제도가 부동산 침체기 속에서 그 취약성이 제대로 드러나고 있다. 집값은 꾸준히 우상향한다는 전제가 깔린 제도였기 때문이다. 전셋집을 구하면 2년 혹은 4년후 보증금을 고스란히 돌려 받을 수 있어 세입자들에겐 자산축적의 징검다리가 돼 줬다. 임대인들도 은행 이자 없이 자금을 융통해 집을 살 수 있는 ‘공짜 대출’ 수단으로 활용했다. 요컨대 전세는 집을 매개로 임대인과 임차인간 거액의 대여금이 오가는 일종의 사금융이다. 활황기엔 은폐돼 있던 사금융의 허술함이 세입자들을 옥죄고 있다. 은행이라면 돈을 빌려줄 때 대출자의 신용도, 담보물의 가치를 꼼꼼히 따진다. 그러나 부동산 가격 급등으로 패닉에 빠졌던 개인들은 집주인들의 상환 능력, 담보물인 빌라나 아파트의 가치를 제대로 따져보지도 못하고 인생이 달린 거액의 대출을 해준 셈이다.
이에 더해 과거와 달리 전세 시장의 왜곡을 불러온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전세 시장의 금융화’다. 원인은 대대적인 전세대출지원 정책이다. 정책금융기관이 보증하는 전세대출상품이 서민 주거 안정을 위해 박근혜 정부에서 도입됐고 문재인 정부에서 대폭 확대됐다. 은행권 전세자금대출 규모가 지난해 말 기준 170조 원에 달한다. 제2금융권으로 넓히면 그 규모는 더 불어난다. 원래 전세는 실수요 시장이어서 거품이 없다는 것이 과거의 통념이었다. 그러나 저금리 시대에 세입자와 함께 리스크를 떠안아 줄 정책금융까지 등장하자 전세 시장에도 유동성의 고삐가 풀리면서 가격은 급등했다. 금융화된 전세시장은 금리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는다. 마치 자산시장처럼 전세시장이 고금리 시대에 맥을 못추는 이유다.
역전세, 깡통전세의 피해는 1차적으로 세입자와 정책금융기관이 떠 안는다. 그 다음엔 전세를 지렛대 삼아 오른 주택 매매 시장이 흔들릴 것이다. 대다수 부동산 전문가들이 향후 집값의 최대 변수로 전세 시장을 꼽는 이유다. 금리나 경기에 따라 진폭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예정된 역전세의 파고를 피할 수는 없는 듯하다. 결함에도 불구하고 전세제도에 정책 지원을 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만 허술한 사금융 제도로 인한 임차인들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인프라를 이참에 제대로 도입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