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 피해자, 산불 피해 이재민, 혁신·벤처 스타트업, 소액생계비 대출이 필요한 취약계층.
이달 들어서만 은행들이 지원하겠다고 밝힌 대상들이다. 국내에서 각종 사회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은행들이 ‘해결사’로 나서는 모양새다. 연초 성과급 잔치를 벌이면서 여론의 뭇매를 맞고 약탈적 금융이라고 낙인 찍힌 주홍글씨를 지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듯 하다. 민간의 영역에 있는 은행들이 굳이 공익적 활동에 나서는 것은 올 들어 부쩍 심각해진 은행에 대한 부정적 여론 때문일 것이다.
지난해 사상 최대 실적을 거둔 은행들의 돈 잔치는 사회적 공분을 샀다. 손쉬운 이자 장사로 벌어들인 수익이 대부분이라 더욱 그랬다. 윤석열 대통령과 이복현 금융감독원장까지 이를 문제삼고 은행의 과점 폐해를 막기 위한 특단의 조치를 내놓겠다고 했다. 은행들이 과점 체제의 수혜를 입어 막대한 이익을 냈다고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 은행이 과점 체제가 된 것은 은행들이 의도한 것인지, 또 은행들이 이자 장사로 쉽게 돈 버는 구조가 과점 체제의 결과물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현재의 과점 체제는 1997년 외환 위기 때 은행의 경쟁력을 위해 대형화가 필요하다며 정부가 합병을 유도한 결과물이다. 또 은행들의 예대마진(대출금리와 예금금리의 차)이 늘어난 것은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2021년 8월부터 올해 1월까지 10회에 걸쳐 0.50%에서 3.50%까지 인상한 영향이 크다. 경기 불황 속 금리 인상기에 은행들이 대출 부실화에 대비하기 위해 예대마진을 높이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지적도 있다.
국내 은행들이 이자 장사에서 탈피하고 미국 은행들처럼 비이자 수익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JP모건·뱅크오브아메리카·씨티은행·웰스파고 등 미국 4대 은행의 지난해 총수익 대비 비이자 수익 비중은 30.8%에 달한다. 같은 기간 국내 시중은행이 총수익의 9.1%를 비이자 수익으로 올린 것에 비해 3배를 넘어선다. 하지만 미국 은행들이 비이자 수익을 낸 항목을 살펴보면 예금계좌 수수료나 현금자동인출기(ATM) 이용 수수료, 파생상품 거래, 트레이딩 수익 등이어서 국내에 도입하기엔 무리가 있다.
금융당국의 ‘은행 때리기’가 은행 과점 체제의 구조적 배경에 대한 분석이나 금융시장 상황에 대한 깊은 고민 후에 나온 것인지는 의문이다. 윤 대통령이 은행 산업의 경쟁 시스템 강화 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한 직후 은행권 경영·영업 관행·제도 개선 태스크포스(TF)가 꾸려져 매주 논의 결과가 발표되고 있지만 성과보수체계 개선, 사회공헌 활성화, 점포폐쇄 내실화 등 은행 본연의 경쟁력 제고와는 거리가 먼 느낌이다.
하반기로 갈수록 경기가 더욱 악화되고 은행들의 실적도 지난해 수준에 미치지 못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당국의 압박에 예대마진은 줄고 신규 연체율이 빠르게 증가하면서 대출 부실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사태 이후 대출 연장, 이자 유예 등을 해줬으나 9월부터 이 같은 조치가 종료되면 다중채무를 보유한 자영업자의 상당수가 원리금 상환에 실패해 금융권 부실의 뇌관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은행들의 건전성 강화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상황이다.
은행의 이익이 많다고 정부가 개입하면 은행이 이익 창출을 위해 혁신을 할 인센티브가 없어진다. 또 은행이 돈을 많이 벌었을 때 정부가 개입한 것처럼 위기 상황에서도 정부가 구제해줄 것이라 믿고 위기 대응에 소홀할 수 있다. 단기에 은행 과점 체제를 깨부수는 성과를 도출하려 하기 보다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장기적 관점에서 국내 은행이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는 방법을 검토해야 한다. 돈을 많이 벌었다고 죄를 묻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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