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력이 도서 지역 전력공급을 위해 설비 운영을 위탁한 JBC(옛 전우실업) 직원들에 대해 법원이 한전이 직접 고용하라는 취지의 판결을 내리면서 파장이 커지고 있다. 한전으로서는 누적 적자 해소를 위해 조직과 인력을 감축하려는 자구 노력에 차질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또 20년 넘게 이어진 퇴직자 단체와의 부적절한 공생 관계를 끊어내려던 계획도 수포로 돌아가게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11일 에너지 업계 등에 따르면 JBC 직원 145명이 한전을 상대로 낸 근로자지위확인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이 내려진 직후 한전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법원 판결을 접한 복수의 한전 관계자는 ‘앞으로가 더 걱정’이라며 착잡한 심경을 숨기지 못했다. 향후 대응 방안 마련을 위한 회의도 곧 소집될 예정이다.
발전노조에 따르면 JBC 직원 대다수가 한전으로부터 상당한 수준의 업무 지휘·명령을 받아 실질적인 근로자 파견에 해당한다는 원고 측 주장이 대부분 인용된 것으로 보인다. 발전노조 관계자는 “사실상 완승했다”며 “한전이 법원 판단을 존중해 빠른 시일 내 직고용 절차를 개시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JBC 직원들은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18~2020년 공공 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논의가 무산되자 소송에 착수했다. 이후 3년 3개월간 10여 차례의 변론 끝에 이달 9일 1심 선고가 내려졌다.
소송전의 발단은 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전은 1996년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던 거문도 등 6개 도서전력설비를 인수한 뒤 JBC와 위탁 운영 계약을 체결했다. 이어 1999년 울릉도 등 2개 발전소, 2003~2005년 대청도 등 26개 발전소, 2007~2012년 문갑도 등 29개 발전소를 추가 인수한 한전은 JBC에 잇따라 위탁 운영을 맡겼다. 지난해 말 기준 JBC는 총 65개의 도서전력설비를 한전으로부터 위탁받아 운영하고 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한전이 도서발전소 운전·정비 일감을 한전 퇴직자 모임이 세운 JBC에 몰아준 게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JBC는 한전전우회가 100% 출자해 만든 회사다. 한전으로서는 직원들의 도서 지역 근무 기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뿐더러 퇴직자들을 챙겨주기도 용이한 방식이기도 했다. 섬의 규모에 따라 많게는 20~30명, 적게는 7~8명의 JBC 직원들이 설비 운전과 정비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문제는 수십억 원의 배당을 통해 한전전우회의 배만 불려주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매출 682억 원, 영업이익 31억 원, 당기순이익 27억 원을 기록한 JBC는 18억 8000만 원의 배당금을 한전전우회에 지급했다. 주당 배당률은 58.75%에 달한다.
이처럼 오랜 수의계약을 통한 일감 몰아주기 논란은 국회와 감사원 등에서 수차례 지적받기도 했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소속 박영순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지난해 10월 국정감사에서 “도서발전은 연간 1000억 원의 손실을 보고 있지만 필수 공익사업이라 전력기반기금에서 손실분을 모두 보전해준다”며 “손해가 나지 않는 도서발전사업 일감을 불법 파견을 통해 한전전우회에 몰아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박 의원은 올 1월 한전의 JBC 위탁과 불법 파견을 금지하는 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이에 한전은 JBC 직원들이 제기한 소송 결과를 지켜본 뒤 도서전력 운영 방식을 개선하겠다며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법원의 직고용 판결에 맞닥뜨리게 됐다. 한전 내부에서는 도서 지역을 관리하는 조직을 신설해 용역 업무를 흡수하고 직고용하는 게 최상책이지만 천문학적인 적자 해소를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상황에서 최대 600명의 인건비를 감내하기는 어렵다는 반응이다. 또 도서지역업무 전담 자회사를 만든 뒤 독립 경영을 유도하는 방안도 거론되지만 이를 거부하는 JBC 직원들이 또다시 소송전에 나설 경우도 부담이다. 자칫 일부 직원만 자회사로 가고 나머지는 직고용을 고수하면서 ‘한 지붕 두 집 살림’이 차려질수도 있다는 의미다.
더욱이 지난달 정승일 사장의 자진 사퇴로 수장 공백 사태를 맞고 있는 상황도 한전으로서는 부담이다. 사장 공백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면서 한전은 중요한 의사결정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한전이 1심 판결을 받아들이기보다 항소를 통해 직고용 문제를 장기전으로 끌고 갈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한전의 한 관계자는 “구체적인 판결 내용을 보지 못했으나 25조 7000억 원 규모의 자구안 추진이 벌써 예상치 못한 암초를 만난 셈”이라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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