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끝나고 미국의 고용률이 오르는 등 내수 경기가 좋아지고 있지만, 유독 대형 오피스 건물은 최대 30% 가까이 빈상태를 유지하면서 국내 기관투자가의 속앓이가 길어지고 있다. 국내 투자자가 외면해온 일본은 바닥을 찍고 완만한 상승세를 보이고, 한 때 국내 투자자의 진출 러시를 이룬 홍콩 역시 중국에 편입되고 자본 이탈이 이어지면서 잠재 부실이 커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13일 서울경제신문의 현지 취재에 따르면 미국 로스앤젤레스시(LA)의 공실률은 평균 24%이지만 중심지는 30%에 육박한다. 샌프란시스코 시 역시 공실률은 31.6%에 달한다. LA 금융 중심지 월셔 블러바드에 있는 에이온센터(AON CENTER)는 62층 규모에 실제 입주사가 보험사인 에이온을 포함해도 46%가 비어있다. 1층에 커피숍은 평일 한낮에도 영업을 하지 않았고 30석 규모의 라운지에는 2명만 일하고 있었다. 에이온센터는 2014년 2억 6850만 달러(3576억원)에 팔렸고, 2020년에 대대적인 내부 수리를 거쳤다. 그러나 지난 5월 1억 6000만 달러(2131억 원)에 매각됐다.
에이온센터 바로 옆에 있는 주상복합 건물인 페가수스 아파트는 1층 가게와 식당이 있던 자리가 1년 째 공실이다. 그곳에서 2006년부터 운영하던 빵가게는 자금 부담으로 문을 닫는다는 안내문을 써 붙였다.
실리콘밸리가 있는 산호세와 팔로알토 지역도 공실로 몸살을 앓고 있다. 스타트업과 벤처캐피탈이 들어선 팔로알토 거리에는 저층 건물 2~3개 당 하나씩 공실이었다. 구글 본사 바로 옆에도 건물을 통째로 임대한다는 광고가 내걸렸다. 현지에서 만난 한 투자자는 “빈 사무실을 노숙자가 차지하면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면서 “주요 테크 기업들을 위한 대규모 건물은 시세 하락을 우려해 임대료를 유지하는 대신 내부 인테리어 비용을 건물주가 모두 부담한다”고 전했다.
반면 사무실이 아니라 생산시설과 대형 연구시설에 대한 수요는 늘어나고 있다는 게 현지의 전언이다. 현지 벤처캐피탈 관계자는 “미국 내 경기가 호조세인 덕인지 생산시설과 연구시설은 신규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면서 “기존 오피스에 물린 대형 투자자들은 새로운 수요에도 불구하고 나설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넓은 규모를 차지하는 기업은 테슬라의 엔지니어링 본사였다. 실리콘밸리의 창시자로 불렸던 휴렛팩커드가 떠난 그 자리다.
서부보다 상대적으로 사정이 낫다는 동부도 마찬가지다. 뉴욕시의 공실률은 22.7%에 달해 과거 평균의 2배로 높아졌다. JLL는 뉴욕의 오피스 빌딩의 시장가치가 최근 760억달러(약 100조원) 하락했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는데 상업용 부동산 가격이 떨어진 것은 2011년 이후 12년 만이다.
국내 투자자의 손실도 속속 나타나고 있다. 이지스자산운용은 뉴욕 브로드웨이에 있는 아메리칸이글 리테일 빌딩에 투자한 1억 400만 달러(1385억 원) 중 80% 가량을 손실 처리 할 것으로 보인다. 3년 전만 해도 이 건물의 1층 임대료가 미국 내 다른 지역보다 최대 40배 비쌀 정도로 인기가 높았지만 코로나 이후 재택 근무가 정착되면서 건물 가격과 기대 수익률이 폭락한 결과다. 실제 사무실 점유율로 보면 전망은 더욱 어둡다. 건물 관리업체 캐슬시스템에 따르면 7월 중순까지 로스앤젤레스, 필라델피아, 뉴욕 메트로 지역의 평균 사무실 점유율은 50% 미만이었고 시카고는 53.4%에 불과하다. 코로나 전 점유율은 90~100%에 가까웠다. 기관투자가 자문사인 노스피어의 짐 샤인버그 대표는 “많은 건물의 투자자가 50~60%만 지분으로 보유하고 나머지를 대출로 메웠다”면서 “기관투자가의 고통은 이제 시작”이라고 지적했다.
홍콩은 2020년 보안법 사태로 사실상 중국에 편입되면서 해외 자본이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이제는 아시아 금융 허브 지위를 싱가포르에 뺏길 가능성이 커졌다는 게 현지 투자자들의 중론이다.
4월 말 기준 홍콩 A등급 오피스의 공실률은 15%에 육박했으며 홍콩재벌 리카싱이 소유한 청쿵센터도 25%가 비어있다. 그나마 중국 국경 개방으로 중국발 수요가 늘면서 5월 말 기준 전체 공실률은 12.4%로 내려갔다. 다만 A등급 사무실 임대료는 2019년보다 31% 하락했다. 홍콩에서 가장 비싼 건물로 꼽히며 JP모건체이스·HSBC등 주요 금융기관이 입주한 국제금융센터(IFC)건물은 임대료를 2~3년 전보다 30% 낮춰서 재계약했다.
국내 증권사 중 홍콩 현지화 전략을 폈던 미래에셋금융그룹이 당장 유탄을 맞았다. 미래에셋계열인 멀티에셋자산운용이 2019년 약 2800억 원을 투자한 골딘 파이낸셜 글로벌 센터는 투자금의 80%가 손실될 위기다. 여기에는 우리은행과 미래에셋증권에서 각각 750억 원과 240억 원을 투자하는 등 총 1640억 원의 고액자산가와 법인 자금이 들어있다. 그 밖에 한국투자·미래에셋·유진투자증권 등과 한국은행 노조, 보험사 등도 총 1150억 원을 투자했다.
직접 찾은 골딘파이낸셜글로벌센터는 금융기업이 몰려있는 센트럴 지구는 물론 역과도 거리가 있었다. 주변에는 아파트와 국제학교, 경찰서 등이 있어 주거지역에 가까웠다. 건물 1~2층에 있는 카페와 식당도 모두 문을 닫았다.
상대적으로 일본은 도쿄 비지니스지구 공실률이 5월 기준 6.1%대로 최근 들어 안정적인 수준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연말을 기점으로 바닥을 지났다는 게 현지 전문가들의 총평이다. 도쿄 긴자와 도쿄역, 신주쿠, 시부야 등 주요 거리는 엔저현상과 일본 정부의 입국 규제 완화로 외국인 관광객이 몰리면서 북적이고 있었다. 현지에서 만난 관계자는 “일본은 -0.1% 기준금리를 유지하고 있는데 일본 중앙은행이 보유한 국채물량이 많기 때문에 급격한 금리인상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전망했다.
일본 정부가 시중에 유동성을 푸는 행보도 이어가고 있다. 일본 정부는 올해 상반기 고물가에 대처하기 위한 방편으로 가구당 3만엔의 지원금을 지급했다.
도쿄는 코로나 국면에서도 오히려 오피스 가격이 상승하기도 했다. 한국투자리얼에셋운용이 2020년 883억원을 투자해 지난 7월 청산한 기오이쵸PREX는 배당을 포함한 누적수익률이 55%에 달한다. 다만 일본은 그동안 성장성이 더디고, 폐쇄적인 투자문화 탓에 국내 투자업계의 관심이 적었다. 상대적으로 소규모 투자자가 많은 덕에 하강 국면을 버티지 못하고 손실을 보기도 했다.
이화자산운용은 2019년 도쿄에 있는 네스트호텔 도쿄 한조몬에 투자했지만 2022년 11월 최종 74%의 손실을 확정했다. 코로나 타격을 견디지 못한 셈이다. 이화운용은 최소 수백억원의 손실을 입은 것으로 추산된다.
업계 관계자는 “글로벌 대형 투자사들은 일본은 포함해 전세계 각국 오피스에 10년 이상 분산 투자하지만 한국은 규모가 작은 탓에 일본에 대해서는 최근 들어 저가 매수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로스앤젤레스·뉴욕·홍콩·도쿄=임세원·이충희·박시은·양지혜기자why@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