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 서울 압구정에 위치한 기아(000270)의 브랜드 체험 전시장 ‘Kia360’에 들어서니 국산 1호 승용차 ‘브리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아가 1974년 출시한 이 후륜구동 승용차는 1981년 단종된 이후 기아의 창고에서 외부 껍데기만 남겨진 채 40년이 넘는 세월을 보냈다.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했던 브리사는 기아의 헤리티지 프로젝트 차종으로 선정돼 5개월 간의 복원 작업을 거쳐 ‘그 시절, 그 모습, 그대로’ 환생했다.
현장에서 살펴본 브리사는 곳곳에 ‘올드카’의 느낌이 물씬 났다. 사이드미러는 차량 측면이 아닌 전면부인 보닛에 부착돼 있었고, 내부 좌석엔 머리 받이가 없었다. 안전벨트도 보이질 않았는데 지금과 달리 당시엔 안전벨트 착용이 의무화되지 않아서 이런 차량들이 다수였다고 한다. 요즘 소비자의 시각에선 이해할 수 없는 처사(?)지만 그래서 더욱 그 시절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트리거가 되기도 한다. 엠블럼과 휠, 핸들 등 모든 부품들은 모두 지금으로부터 49년 전 출시 당시 그 모습 그대로 재현됐다. 브리사 주변에서 머문 약 10분간은 현 시대와는 확연히 느낌이 들었다.
스페인어로 ‘산들바람’을 의미하는 브리사는 기아 최초의 후륜구동 승용차다. 1974년 12월 출시 때만 해도 일본 마쓰다 플랫폼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나 2년 만인 1976년 국산화율 90%까지 끌어올렸다.
출시 당시 오일쇼크로 국내 경제마저 위협받던 시기였지만 브리사는 우수한 경제성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하루 유지비 2000원의 경제형 세단”이라는 광고 문구를 내세운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이에 부담 없는 국산 차로 한때 승용차 부문 점유율 60%를 차지할 정도로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다. 택시로도 많이 사용됐는데, 영화 ‘택시 운전사’에서 주연인 송강호 배우가 몰던 택시도 브리사다. 1981년 단종 이후에도 드라마나 영화 속 1970~80년대 대한민국을 보여주는 오브제 중 하나로 현재까지 활약을 이어오고 있다.
이른바 ‘삼발이’로 불리던 T-600도 전시장에 자리하고 있었다. T-600은 1969년 국내에서 생산된 마지막 삼륜 화물차다. 작고 가벼운 차체로 좁은 골목길이나 산동네 언덕길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어 생필품이던 쌀과 연탄 등을 운송하는데 주로 쓰였다. T-600은 자전거를 생산하던 기아가 자동차 제조업체로 성장하는 발판이 됐다. 도로가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던 시기에 물류 이동에 적극 활용되며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이처럼 기아가 헤리티지 복원에 열을 올리는 것은 브랜드 정체성을 강화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기아는 1944년 경성정공으로 시작해 올해로 회사 창립 79주년을 맞았다. 창립 이후 1952년 기아산업, 1990년 기아자동차, 2021년 기아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성장과 궤를 같이하며 고유의 헤리티지를 발전시켜 왔다. 다수 인원을 수송하던 봉고(1981년 출시), 기아 황금기를 연 프라이드(1987년), 세계 최초 도심형 스포츠유틸리티(SUV) 차량인 스포티지(1993년) 등이 대표적이다.
나아가 신생 완성차 업체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전동차 전환이라는 흐름 속에서 테슬라와 비야디(BYD) 등 신생 전기차 업체는 갖추지 못한 전통과 성공 경험을 내세워 소비자의 신뢰를 확보하고 구매 선택까지 끌어내겠다는 것이다. 기아는 전시장에 대표적인 전기차 모델인 EV6와 EV9를 함께 배치해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려는 듯했다. 현대자동차도 대한민국 최초 독자 개발 차량인 포니를 필두로 헤리티지 강화에 공들이고 있다.
기아 관계자는 “79년이라는 시간 동안 모빌리티 기업으로서 고객과 함께해 온 여정을 되돌아보고 그 의미를 되새기고자 이번 헤리티지 전시를 준비했다”며 “기아의 독자적인 브랜드 가치를 전달할 수 있도록 앞으로도 다양한 헤리티지 활동을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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