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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도 여자도 아닌 '나'답게…당당한 '그들'의 이야기 [어쩌다 커튼콜]

■ 세상의 편견 깨는 무대 위 '퀴어'

20세기말 美할렘가 배경인 뮤지컬 '렌트'

에이즈·마약·매춘 속 피어난 애환 다뤄

드래그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킹키부츠'

'나다운 건 나 자신' 메시지로 감동 선사

내달 '13후르츠케이크''와이프' 막 올라

퀴어물 날로 늘어 인식전환 계기될지 주목






비싼 돈을 내고 공연장에 갔는데 앞사람 키가 너무 커 두 시간 넘게 고개만 기웃거리다 온 적이 있나요? 배우의 노래와 연기뿐 아니라 숨소리까지 여운이 남아 같은 돈을 내고 본 공연을 또 본 적은요? 그리고 이런 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이 없어 혼자만 간직하느라 답답한 적은 없나요? 세상의 모든 공연 덕후의 마음을 대신 전하기 위해 기자가 나섰습니다. 무대 위 출연진에게 박수가 쏟아지는 그 어떤 곳이라도, ‘어쩌다 커튼콜’과 함께하세요.


뮤지컬 ‘렌트’의 공연 모습. 사진 제공=신시컴퍼니


루돌프를 연상하는 머리띠와 눈부시게 영롱한 빨간 치마, 명품 브랜드 ‘지미 추’ 구두보다도 더 반짝이는 하이힐, 그리고 긴 속눈썹까지. 그 모습과 너무 잘 어울리는 캐릭터 ‘엔젤’이 무대에 등장하자 사람들은 폭소를 터뜨립니다. 표정·말투·목소리·걸음걸이까지 어느 것 하나 여자가 아니라면 할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는 이 배우는 아이돌그룹 2AM 출신의 조권입니다.

여장 남자인 엔젤은 미국 뉴욕의 할렘가에 살고 있습니다.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지만 밴드를 하며 꿈을 키우는 할렘가 친구들 사이에 어느 날 불쑥 그야말로 엔젤(천사)처럼 끼어들었죠.

엔젤을 친구들에게 데리고 온 사람은 콜린입니다. 콜린은 거리의 부랑아에게 옷을 빼앗기고 헤매던 중 여장 남자인 엔젤을 보고 한눈에 사랑에 빠집니다. 콜린의 손에 이끌려 간 재건축 건물의 옥상에는 또 다른 동성 커플, 조앤과 모린이 있습니다. 아, 물론 이성 커플인 로저와 미미도 있죠. 엔젤은 이들 사이에서 사랑을 전파하는 그야말로 천사 같은 역할을 합니다. 세상의 편견 어린 시선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친구들에게 마치 마법의 막대기를 든 요정처럼 시종일관 몸을 흔들고 노래를 부르며 희망을 선사하죠.

‘렌트’, 편견 대신 사랑을 전하는 크리스마스 시즌물


뮤지컬 '렌트' 공연 사진. 사진 제공=신시컴퍼니


여기까지만 읽고 어쩌면 미간을 찌푸리는 독자들도 있을 겁니다. 아직도 ‘대중 예술인 뮤지컬 무대에 퀴어 코드라니, 그것도 아이돌 가수가 그 역할을 한다니’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테니까요. 그런데 이달 11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 신한카드 아티움에서 막을 올린 뮤지컬 ‘렌트’의 장내 분위기는 그런 세상의 편견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큰 극장은 아니지만 빈틈없이 공연장에 사람이 꽉 차 있었고, 많은 관객이 박수 치고 웃고 즐겼죠. 2막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는 눈물을 훔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자칫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자세한 내용을 다 말할 수는 없지만) 160분간 이어지는 공연에서 ‘퀴어’라는 단어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저 ‘아, 저 둘이 정말 많이, 처절하게 사랑하는구나’ ‘저 친구들이 모두 서로를 뜨겁게 아끼고 원하는구나’라는 생각만 했습니다. 남성과 남성, 여성과 여성, 그리고 에이즈 걸린 여성과 남성 등 세 커플이 등장하는 이 공연은 그저 청춘물이고 연애물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상이 편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엔젤이 세상에게 ‘사랑’을 이야기하는 감동적인 크리스마스 시즌물이기도 합니다.

국내 무대에서 퀴어는 이제 흔한 소재입니다. 무대 밖 세상은 여전히 성 정체성에 대한 편견이 가득하지만 무대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렌트’만 해도 2000년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을 시작했는데요. 지금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보수적이었던 당시 한국 사회에서 이 작품은 우려와 달리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동성애·마약·에이즈 등 세상의 모든 편견이 한 무대에 등장하는데도 좋은 평가를 받은 것은 탄탄한 대본과 배우들의 연기력 덕분이겠죠.

뮤지컬 '렌트' 공연 사진. 사진 제공=신시컴퍼니


‘렌트’는 20세기 말 미국 뉴욕의 할렘가에 살고 있는 젊은 예술가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제작자인 조너선 라슨은 실제 배경이 되는 지역에 거주하며 작품을 구상했는데요. 작품의 줄거리는 사실 라슨 본인과 친구들의 이야기라고 해요. 우리는 1990년대 미국의 젊은이들을 역사상 가장 큰 인기를 누린 TV 시트콤 ‘프렌즈’로만 기억하고 있죠. 하지만 사실 당시 미국에는 에이즈·마약·매춘이 공공연했습니다. 진짜 삶은 오히려 그곳에 있었죠. 죽음의 문턱 앞에서 예술을 하며 삶을 이어가는 등장인물들처럼 라슨과 친구들도 그렇게 살았다고 해요. 실화보다 더 실화 같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작품은 너무나도 웃기고 슬픕니다. 배우들이 슬픈 표정으로 웃으며 연기한다고 해야 정확하겠죠. ‘애환’이라는 단어가 너무나 어울리는 작품이죠.

퀴어물이 비극이라 생각한다면 ‘킹키부츠’를 보라


뮤지컬 '킹키부츠' 공연사진. 사진 제공=CJ ENM


‘퀴어물’을 떠올릴 때 대중은 아마도 슬픈 사랑을 이야기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금지한 사랑을 하는 주인공이 슬프게 사랑하고 비극적으로 헤어지는 게 많은 퀴어물의 정해진 스토리이기도 하죠. ‘렌트’도 그런 작품이고요. 하지만 그것마저 편견이 아닐까요. 퀴어 뮤지컬의 스테디셀러 ‘킹키부츠’를 보세요.

‘킹키부츠’의 주인공 롤라는 ‘드래그퀸’입니다. 드래그는 자신의 성별과 다르게 겉모습을 꾸미는 행위인데요. 남성이 치마나 망토를 입는 것이 바로 드래그입니다. 그런데 사실 왜 남성이 치마를 입는 것을 부르는 용어가 필요할까요. ‘킹키부츠’의 롤라는 ‘킹키부츠’라고 하는 남성용 부츠 공장에 영입된 디자이너입니다. 그는 드래그퀸이기도 하지만 수준급 복서이기도 하죠. 롤라의 회사 생활은 쉽지 않습니다. 마초적이고 보수적인 동료들은 롤라를 편견 어린 시선으로만 바라보죠. 하지만 롤라는 오히려 사람들에게 “네가 힘들 때 곁에 있을게. 삶이 지칠 때 힘이 돼줄게. 인생 꼬일 때 항상 네 곁에 함께”라고 말합니다.

뮤지컬 '킹키부츠' 공연사진. 사진 제공=CJ ENM


저는 정성화 배우가 롤라를 연기하는 ‘킹키부츠’를 관람했는데요. 이 작품 속 롤라는 사실 남자도 여자도 아닙니다. 그냥 ‘롤라’ 그 자체입니다. 저는 이 작품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왜 우리는 꼭 우리가 남성이거나 여성이어야 한다고 생각할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킹키부츠’에서 롤라는 다소 무거울 수 있는 뮤지컬의 주제를 밝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는데요. 남성성과 여성성이 모두 담긴 제3의 성을 가진 롤라는 관객들에게 ‘나다운 건 바로 나’라는 메시지를 던지죠.

이 뮤지컬은 기획 단계부터 CJ ENM이 공동 제작자로 참여했는데요. 보수적인 한국 대기업이 이렇게 파격적인 소재를 유쾌하고 대중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에 저야말로 공연을 본 후 대기업에 대한 편견이 깨졌습니다.

성소수자가 여러 캐릭터 중 하나인 날이 올 수 있을까


연말에는 더 많은 퀴어물이 무대에 오를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 달 17일 서울 ‘국립정동극장 세실’에서 개막하는 ‘13 후르츠케이크’는 아예 성소수자를 영웅으로 부각합니다. 이 작품은 인류 발전에 공헌한 성소수자 13인의 아름다운 개인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한스 안데르센, 버지니아 울프,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등등. 고대 동서양 역사 기록 속 주인공들의 삶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펼치면서 성소수자와 소수자가 아닌 이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내용입니다.

다음 달 28일 LG아트센터에서 막을 올리는 연극 ‘와이프’는 여성의 권리 신장과 성소수자에 대한 세상의 시선을 그리고 있는데요.1959년·1988년·2020년 각 시대마다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보여줍니다. 1959년에도 레즈비언이 있었고 1988년에도 게이가 있었죠. 그리고 미래인 2042년에도 성소수자는 존재합니다. 연말에 막을 올리는 두 작품 모두 ‘성소수자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고 도처에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이처럼 퀴어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 계속 등장하고 또 사랑받는 것은 여전히 퀴어에 대한 편견이 이 세상에 가득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극장을 나서면 여전히 사람들은 게이와 레즈비언을 무조건 에이즈와 연결하곤 하니까요.

하지만 이마저도 만족할 만한 흐름은 아닌 듯합니다. 현재 무대 위 성소수자 캐릭터는 사실 상품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성소수자를 전시한 셈이죠. 퀴어 뮤지컬이 성공하는 것은 성소수자가 상품이 됐기 때문입니다.

‘렌트’와 ‘킹키부츠’의 성공, 그리고 새로운 퀴어 작품의 등장은 고무적입니다. 하지만 언젠가 이들이 수많은 배역 중 하나가 돼 사람들이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는 미래지향적인 순간이 올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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