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출생 문제의 1차적 원인은 출산에 따른 기회비용 증가입니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굉장히 빠르게 개선됐지만 아이를 낳고 육아를 할 수 있도록 사회가 지원하는 시스템은 그 속도를 쫓아가지 못했던 것이죠.”
11일 설립 53주년을 맞는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조동철 원장은 10일 서울경제신문과 만나 “저출생은 참 어려운 문제고 한두 개만 해서 될 일도 아니며 그동안 하지 못한 일들이 누적된 결과”라면서도 “육아에 들어가는 비용을 사회적으로 더 부담해주는 방안을 논의하는 것이 (저출생 대책 마련을 위한) 첫 번째 방향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한국은 지난해 4분기 합계출산율이 0.65명에 그쳤다.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속도의 인구 감소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조 원장은 “과거에는 가부장적 문화 때문에 커리어(경력)를 포기하고 양육에 집중하는 여성이 많았지만 이후 여성의 사회 진출이 일반화하면서 아이를 낳고 일을 포기할 때 생기는 비용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며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졌지만 일과 가정 양립을 위한 사회·정책 기반이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고 진단했다.
그는 정부와 사회의 지원을 더 늘려야 한다는 입장이다. 조 원장은 “여전히 불충분하다는 얘기가 많다”고 단언했다. 접근 방식에 관해서는 부모에 대한 직접 지원보다는 아이에게 혜택이 가는 방향이 더 효율적이라고 짚었다. 조 원장은 “출산한 부모에게 보상을 주는 개념이 아니라 아이를 낳고 키우는 데 드는 비용을 사회가 같이 부담해줘야 한다”며 “어린이집 등원에 바우처를 지급할 때와 부모에게 직접 현금을 제공하는 것을 견줘봤을 때 전자가 더 많아져야 한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정부는 첫만남이용권·부모급여 등 부모에게 제공하는 현금 지원책을 펴고 있는데 실질적인 양육 지원이 더 실효성이 높다는 뜻이다. 조 원장은 “꼭 돈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육아기라든지 출산기에 여성뿐만 아니라 아빠의 경우도 노동시간을 지금보다 유연하게 탄력적으로 적용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한 정책 방향”이라며 “이들 정책만으로 저출생 문제가 풀리진 않겠지만 관련 논의를 고민하는 것이 첫 번째 방향”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합계출산율이 2015년 이후 급락했다”며 “무슨 일이 있어서 그랬는지 이해하기는 쉽지 않지만 이에 대한 원인부터 파악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만 조 원장은 빠르게 떨어지고 있는 출산율 제고와 함께 축소 사회에 적응하는 일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출산율을 회복시킬 수 있는 대책뿐 아니라 낮아지는 출산율에 적응하는 정책도 중요하다”며 “저출생 사회에 시스템을 적응시킬 개혁이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저출생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노동·교육·연금 개혁 등 3대 개혁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특히 그는 노동 개혁에서부터 사회 구조 개편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조 원장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노동시장 문제부터 해결해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노동 개혁에 대한 조 원장의 생각은 “생산성만큼 대접 받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인지 능력보다 나이·학벌 등 겉으로 드러나는 성격이 근로자의 임금을 결정할 때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분석 결과가 있습니다. 일류 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좋은 직장에 들어간 뒤 평생 자리를 내놓지 않는 상황이 이어진다면 외국 고급 인력 유치는 고사하고 우리나라 핵심 인재가 유출되는 문제가 지속될 수밖에 없지요.”
조 원장은 한국 사회에서 대학 졸업장이 중요한 것은 노동시장이 경직돼 있기 때문이며, 노동시장을 바꾸지 않으면 교육 개혁은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소신을 갖고 있다. 쉽게 말해 학벌 우선 사회에서 학부모들은 아이를 좋은 대학에 보내는 것이 최우선 목표이기 때문에 전인교육을 포함한 교육 개혁을 따로 추진해봐야 현장의 요구와 맞지 않을 뿐더러 사교육 시장은 부유한 이들을 상대로 더 교묘한 입시 장사를 벌이게 된다는 진단이다. 이를 고려하면 노동과 교육 개혁은 한몸이며 그 출발은 노동 개혁이 돼야 한다는 얘기다. 그는 “내가 나온 대학과 관계없이 노동시장에서 일을 잘하면 대우 받을 수 있는 그런 시스템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 원장은 “한국 사회에서 대학 졸업장이 중요한 것은 노동시장이 경직됐기 때문”이라며 “우리나라의 교육 시스템은 거의 노동시장의 문제에서부터 파급돼온 것이라고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학생들이 입시 지옥에서 해방돼야 한다는 말에 100% 동의한다”면서도 “노동시장을 그대로 놔둔 상태에서 교육 부문에서 전인교육만 강조하면 바뀔 수 있는 게 없다”고 덧붙였다.
노동시장에 능력주의를 불어넣으려면 노동 유연성 확보가 필수적이라는 것이 조 원장의 지론이다. 그는 KDI가 진행 중인 연구를 소개하며 “해고가 자유로운 미국에서는 50대 이상 근로자의 근속연수가 증가세를 보인 반면 한국은 오히려 급락하는 모습을 나타냈다”고 전했다. 이는 한국의 경우 호봉제와 연공서열제로 고연령 근로자의 성과 대비 임금이 너무 높기 때문이다. 특히 고용 안정성을 중시하다 보니 기업 입장에서는 은퇴를 앞둔 근로자를 어떻게든 해고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연금 개혁도 마찬가지다. 지난달 KDI는 2054년 기금 고갈이 예정돼 있는 국민연금을 둘로 나눠 젊은 세대는 지금부터 연금을 따로 적립하고 구세대는 정부가 나랏돈으로 부족분을 메워주자는 파격적인 정책 제언을 했다. 신·구 연금을 따로 만들자는 것이다. 지금대로라면 연금 고갈 뒤 젊은 세대가 현재의 소득대체율(40%)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현행 9%인 보험료를 35%까지 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조 원장은 연금 개혁도 축소 사회에 적응이 필요한 대표적인 과제라고 보고 있다.
그는 “축소 사회에 적응하는 것 중의 하나가 연금 개혁”이라며 “연금 개혁이 1년만 늦어져도 재정 부담은 매년 50조 원씩 증가한다”고 우려했다. 또 “연금 개혁을 포함한 구조 개혁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 속도전”이라며 “연금 개혁을 빠른 시일 내에 제대로 할 수 있다면 감세 정책 등 다른 곳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다 용서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KDI 역시 구조 개혁 관련 연구에 속도를 낸다는 입장이다. 조 원장은 “과거보다 더 중점을 두려는 연구 분야는 노동·교육 개혁 등 개혁 과제 관련”이라고 말했다. 그는 “KDI가 공무원들을 음지에서 지원만 하던 시절은 지나간 것 같다”며 “핵심 메시지가 잘 전달될 수 있도록 글을 어렵지 않게 일반 대중들이 좋은 연구 보고서를 더 많이 접할 수 있게 하고 싶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KDI 박사들의 외부 커뮤니케이션을 늘리고 정책 간담회도 추진할 계획이다.
의대 정원 문제에 대해서는 아쉽다는 입장을 드러냈다. 조 원장은 “20년 전부터 의대 정원을 차근차근 늘려왔다면 오늘날 이렇게 시끄럽진 않았을 것”이라며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을 20년 더 끌게 된다면 우리 사회가 어떻게 될 것인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의대 입학 정원은 제주대 의대가 신설된 1998년 이후 늘어난 적이 없다. 이와 관련, 조 원장은 대학 사회의 기득권 문화를 언급하면서 “사회적으로 압력이 생겨 의대 정원을 늘리겠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 아니냐”며 “대학도 전공별 나눠먹기식이 아닌 수요자(학생)들이 원하는 쪽으로 지원 정책이 이뤄져야 하며 잘될 것 같은 곳을 계속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도권 주요 대학에 반도체 관련 정원을 늘리고 싶어도 수도권 과밀화 억제 법안 때문에 못 늘리는 상황이 대표적인 문제 사례라는 것이다.
조 원장은 올해 경기에 대해서는 “반도체를 중심으로 수출이 호조를 보이면서 소폭 개선될 것”이라고 총평했다. 다만 “내수는 올해 하반기보다 상반기가 더 어려울 가능성이 높다”고 부연했다. 상반기까지는 소비 부진에 따른 고비를 넘겨야 한다는 의미다. 감세에 관련해서는 “감세 방향의 정책을 100% 다 동의하는 건 아니다”라면서도 “연금 개혁만 진짜 제대로 빠른 시일 내에 할 수 있다고 한다면 된다. 감세는 다 합쳐도 10조 원이 안 될 것”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He is…
△1961년 서울 △1984년 서울대 경제학과 학사 △1991년 위스콘신대 경제학 박사 △1991~1995년 텍사스A&M대 경제학과 조교수 △1995~2009년 KDI 연구위원·선임연구위원 △2005~2006년 재정경제부 장관 자문관 겸 거시경제팀장 △2008~2009년 KDI 거시·금융경제연구부장 △2013~2016년 KDI 수석이코노미스트 △2016~2020년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 위원 △2022년 KDI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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