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SK그룹 회장이 24일(현지 시간) 미국 실리콘밸리를 찾아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와 만났다. 인공지능(AI) 반도체의 핵심 부품인 고대역폭메모리(HBM) 협력에 관해 논의했을 것으로 관측된다.
25일 최 회장은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엔비디아의 수장 황 CEO와 함께 찍은 사진을 올렸다. 최 회장은 황 CEO와 미국 실리콘밸리의 엔비디아 본사에서 만나 이 사진을 촬영했다. 최 회장은 이 사진과 함께 “혁신의 순간을 잡아낼 때는 카메라 각도가 중요하다”는 설명을 달았다. 또한 황 CEO는 최 회장에게 건넨 엔비디아 소개 책자에 “우리의 파트너십과 인공지능(AI) 및 인류의 미래를 함께 만들어가자”는 글귀와 사인을 남겼다.
최 회장과 황 CEO의 만남을 두고 HBM과 관련한 논의를 했을 것이라는 관측에 무게가 실린다. 엔비디아는 AI 칩 선두 주자로 전 세계 AI 칩 시장의 80%를 장악하고 있는 기업이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엔비디아의 AI용 그래픽처리장치(GPU)에 탑재되는 4세대 HBM(HBM3)을 단독으로 공급하며 이 시장 1위에 올랐다.
SK하이닉스는 신제품인 5세대 HBM(HBM3E)에서도 삼성전자에 앞서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황 CEO가 지난달 미국 새너제이에서 열리는 연례 개발자 콘퍼런스 ‘GTC 2024’ 기자 간담회에서 “삼성전자의 HBM을 테스트하고 있다”고 말해 SK하이닉스를 긴장시켰다. 또한 그는 다음날에는 삼성전자 부스를 직접 방문해 전시된 삼성의 12단 HBM3E 위에 ‘젠슨 승인(JENSEN APPROVED)’이라고 사인하기도 했다. 황 CEO의 이날 ‘승인’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삼성 HBM 제품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냈다는 분석이 나왔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최 회장의 행보가 HBM 분야에서 기술 경쟁을 하고 있는 삼성전자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3조 4023억 적자 늪에서 2조 8860억 흑자로…1년 만에 턴어라운드
최 회장이 황 CEO를 만나는 사이 SK하이닉스는 올 1분기 시장 전망치를 뛰어넘는 깜짝 실적을 공개했다. 인공지능(AI) 열풍 속에 주력 제품인 메모리반도체 가격이 상승한 덕분이다. 메모리반도체 시장이 지난해 최악의 한파를 지나 본격적인 빅사이클에 진입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SK하이닉스는 올 1분기 영업이익이 2조 8860억 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영업손실 3조 4023억 원에서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이는 1조 8000억 원대였던 시장 전망치를 상회한 결과이자 1분기 기준으로 2018년 이후 최대 실적이다. 매출은 12조 4296억 원으로 지난해 동기보다 144.3% 증가하면서 1분기 기준 최대치를 나타냈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반도체 경기 침체 속에 4분기 연속 적자를 기록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지난해 4분기 D램을 중심으로 흑자 전환에 성공한 데 이어 올 1분기 ‘어닝 서프라이즈’를 기록하며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고대역폭메모리(HBM)가 실적 반등을 이끌었고 D램에 비해 회복세가 더뎠던 낸드플래시도 평균 가격이 30%나 오르며 흑자를 달성했다. SK하이닉스는 “AI 시장에서 고용량 낸드 수요가 늘어나고 있어 2분기에도 낸드 흑자 기조가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SK하이닉스는 이날 콘퍼런스콜에서 올해 하반기부터 메모리 빅사이클이 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올해 설비투자액도 당초 계획보다 올려 잡기로 했다. 청주 공장에 20조 원을 투자해 신규 D램 라인을 짓기로 한 계획은 이미 공개했다. 김우현 SK하이닉스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올해 투자 규모는 빠르게 성장하는 HBM 수요 대응과 M15X에 대한 투자로 연초 계획보다는 다소 증가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HBM 끌고 낸드 흑자전환…"과거 호황기 버금 가는 빅사이클 올 것"
SK하이닉스가 1분기 깜짝 실적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인공지능(AI) 열풍이 몰고 온 메모리 칩 수요 회복 덕분이다. 특히 ‘프리미엄 낸드’로 불리는 기업용 데이터저장장치(eSSD)를 중심으로 회복이 더뎠던 낸드 부문까지 흑자 전환에 성공해 실적 회복을 이끌었다.
SK하이닉스는 올해 HBM3E 8단 제품 판매를 확대하고 하반기부터는 12단 제품 양산 준비를 본격화해 AI 메모리 시장에서 우위를 유지한다는 계획이다. 수익성이 높은 제품의 생산능력을 키우기 위한 시설 투자도 계획보다 늘리기로 했다.
김우현 SK하이닉스 최고재무책임자(CFO) 부사장은 25일 실적 발표 후 진행된 콘퍼런스콜에서 “올해 메모리 시장 규모가 과거 호황기에 버금가는 수준에 도달할 것”이라고 했다. 그만큼 메모리반도체 시장이 장기간 이어진 불황에서 벗어나 완연한 반등 추세에 접어들었다는 뜻이다.
1분기 D램 평균판매가격(ASP)은 전 분기 대비 20% 이상 상승했다. 2개 분기 연속 전 제품군을 아우른 가격 상승이 지속됐다. 혹독한 겨울을 보낸 낸드는 프리미엄 제품인 기업용 eSSD 위주로 판매가 확대되며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제품 가격 역시 전 분기 대비 30% 이상 올랐다. 지난해 SK하이닉스는 낸드 가격이 원가보다 낮아져 팔수록 손해를 보는 악순환에 빠졌지만 올해 들어 서버 완제품(OEM) 업체들이 AI 서버 증설 과정에서 eSSD 구매를 빠르게 늘리면서 분위기가 반전됐다. 가격 상승에 따른 재고평가손실 환입 규모도 전 분기 대비 상승한 9000억 원을 기록하며 흑자 전환에 힘을 실었다.
김석 SK하이닉스 낸드마케팅 담당은 “비정형 데이터 특유의 헤비 워크로드(대량 컴퓨터 작업 종류와 양)를 처리하기 위해서 기존 솔루션 소비전력이 낮은 고용량 낸드 솔루션의 수요가 늘었다”며 “이는 AI 시장 확대로 발생한 신규 수요로 구조적인 변화일 수 있다는 점에서 낸드 공급 업체 입장에서는 상당히 긍정적”이라고 설명했다.
D램과 낸드 판매가 순항하면서 재고도 안정적인 수준에 도달했다. SK하이닉스는 1분기 메모리 완제품 재고가 D램과 낸드 모두 감소했다고 밝혔다. SK하이닉스의 1분기 재고자산은 13조 8450억 원으로 재고가 절정에 달했던 지난해 1분기(17조 1820억 원)보다 20% 가까이 감소했다. SK하이닉스는 고부가 제품뿐 아니라 범용(레거시) 제품 재고도 하반기로 갈수록 빠르게 줄어들어 연말에는 공급사와 고객이 보유한 재고도 소진될 것으로 전망했다.
메모리 빅사이클에 발맞춰 AI 메모리를 적기에 공급한다는 계획도 공개했다. SK하이닉스는 올 3월 세계 최초로 양산을 시작한 HBM3E 공급을 늘려 2분기 D램 출하량이 전 분기 대비 10% 중반대 상승할 것으로 내다봤다. 10나노 5세대(1b) 기반 32Gb(기가비트) 더블데이터레이트(DDR)5 제품을 연내 출시해 고용량 서버 D램 시장 주도권도 강화하기로 했다.
김규현 SK하이닉스 D램 마케팅담당은 “HBM3E 12단 제품은 고객의 요청 일정에 맞춰 올해 3분기 개발을 완료하고 고객 인증을 거쳐 내년 수요가 본격적으로 늘어나는 시점에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며 “HBM3E의 경우 현재의 진척도를 고려하면 가까운 시일 내에 HBM3와 비슷한 수준의 수율 달성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낸드 사업에서는 기업용 eSSD 판매 확대에 힘입어 그간 수조 원 적자를 기록해온 자회사 솔리다임의 실적 개선 속도를 높일 계획이다. 시장조사 업체 트렌드포스는 최근 발간한 보고서를 통해 AI향 고용량 eSSD 수요 전망치를 한 달 만에 10.4% 상향 조정하는 동시에 솔리다임의 생산능력 전망치 역시 23.1% 올려 잡았다. 빅테크 중심으로 솔리다임의 eSSD 판매를 늘리려는 SK하이닉스의 움직임이 반영된 결과다. SK하이닉스는 “솔리다임이 업계에서 유일하게 보유하고 있는 쿼드레벨셀(QLC) 기반 60테라바이트(TB) 이상 고용량 eSSD 솔루션을 통해 수요 업사이드에 대응할 계획”이라고 했다. QLC는 하나의 셀에 4비트 데이터를 기록해 더 효율이 높은 기술로 평가받는다.
생산능력 확대와 수익성 고도화를 위해 보수적 기조를 유지해왔던 시설 투자 눈높이도 다시 올려 잡기로 했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지난해 설비투자를 6조 원대까지 줄인 SK하이닉스가 올해는 14조 원가량을 투입할 것으로 보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이달 24일 충청북도 청주에 건설할 차세대 D램을 위한 신규 팹 M15X에 장기적으로 20조 원 이상의 투자를 집행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으며 이달 초에는 미국 인디애나주에 5조 원을 들여 첨단 후공정 공장을 짓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용인 클러스터 역시 2027년 공장 운영을 목표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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