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최대의 반도체 설계 회사인 AMD가 삼성전자(005930)와의 고대역폭메모리(HBM) 협력을 통해 엔비디아를 추격할 인공지능(AI) 가속기를 출시한다. 엔비디아는 HBM 공급망에서 SK하이닉스(000660)를 선택하고 AMD는 삼성전자와 연합 전선을 구축하면서 AI 칩 전쟁에서의 대결 구도가 선명해지고 있다.
리사 수 AMD 최고경영자(CEO)는 3일 대만 타이베이 난강전시관에서 열린 ‘컴퓨텍스 2024’ 기조연설 현장에서 서울경제신문과 만나 “삼성전자와 최신 HBM 분야에서 협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가 AMD에 공급하는 제품은 5세대 HBM(HBM3E)으로 확인됐다. 이날 수 CEO는 1위 엔비디아를 추격하기 위해 AI용 그래픽처리장치(GPU) MI325X를 올해 4분기에 출시한다고 선언했다. GPU MI325X에는 288기가바이트(GB) 용량의 HBM3E가 탑재되는데 이를 삼성전자가 공급하는 것이다.
삼성전자와 AMD는 HBM 분야에서 상당히 돈독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수 CEO는 지난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세계 최대의 반도체 기술 학회 ‘ISSCC 2023’ 기조연설자로 나서 삼성전자와 HBM-PIM(프로세싱인메모리)을 협력 개발하고 있다고 공식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당시 수 CEO는 “PIM 기술을 활용하면 기존 메모리가 정보를 처리할 때보다 85% 이상 전력을 절감할 수 있다”며 이 기술을 치켜세웠다.
삼성전자와 AMD의 협력 관계가 두터워지면서 AI 반도체, HBM 업계에서는 새로운 대결 구도가 형성되고 있다. 엔비디아는 지난해 4세대 HBM(HBM3) 공급을 위해 이 시장 선두인 SK하이닉스에 선수금까지 지급할 정도로 큰 신뢰를 드러낸 적이 있다. 수 CEO는 TSMC와의 공고한 협력도 줄곧 강조하고 있지만 HBM은 물론 삼성 파운드리와의 3㎚(나노미터·10억 분의 1m) 공정 협력설이 제기되는 등 삼성전자와의 밀착은 더 강화하는 추세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AI 반도체 패권을 놓고 치열한 합종연횡이 진행되고 있다”며 “1위를 쫓아가려는 업체들의 치열한 고민이 연합 전선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평가했다.
리사 수 AMD 최고경영자(CEO)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한국 기업들과의 협업을 강화하기 위해 연내 방한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특히 그래픽처리장치(GPU)에 들어가는 고대역폭메모리(HBM) 공급과 관련해서는 삼성전자뿐 아니라 SK하이닉스와 손을 잡을 가능성도 열어 놓았다.
수 CEO는 3일(현지 시간) 대만 타이베이 난강전시관 ‘컴퓨텍스 2024’ 기조연설 후 진행된 기자들과의 질의응답에서 “한국 기업들과의 비즈니스가 잘 돼가고 있고 더 좋아질 것이라고 믿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SK하이닉스와의 HBM과 관련한 협력 타진 여부를 묻는 질문에는 “멀티소싱(복수 조달) 정책을 추구하기 때문에 (대화 창구를) 열어두고 있다”고 답했다. AMD는 현재 삼성전자로부터 HBM3를 공급받고 있는데 SK하이닉스와의 새로운 협상을 시작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시사한 것이다.
최근 불거진 삼성전자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협업설에 대해서는 “삼성은 훌륭한 파트너”라고 평가하면서도 확답은 피했다. 앞서 AMD는 지난달 3㎚(나노미터·10억분의 1m) 게이트올어라운드(GAA) 공정을 도입해 차세대 칩을 양산한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삼성전자는 2022년 6월 업계에서 가장 먼저 3나노부터 GAA를 도입한 뒤 현재까지 유일하게 3나노 공정에 GAA를 쓰고 있다. 이달 13일 미국 새너제이에서 열리는 삼성 파운드리 포럼(SFF) 2024 행사에 빌 은 AMD 기업담당 부사장이 연사로 나설 예정이라 구체적인 협업 계획을 밝힐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커진 상황이다.
수 CEO는 다만 “미세한 공정 노드를 쓴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고 특정 벤더(삼성전자)를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라며 “3나노에서 TSMC와의 동맹이 단단하다”고 했다. 컴퓨텍스가 대만에서 열리는 대표적인 정보기술(IT) 행사인 만큼 TSMC와의 파운드리 협업 관계를 강조한 것으로 해석된다.
수 CEO는 기조연설에서도 AI 반도체 시장에서 리더십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생태계 확장을 여러 번 언급하며 파트너십 강화 의지를 드러냈다. 기조연설 중에는 마이크로소프트(MS)와 HP·레노버·에이수스 등 유력 PC 제조사들의 수장이 등장해 AMD와의 협력 관계를 과시했다. 이들은 이번 컴퓨텍스에서 AMD 프로세서를 탑재한 차세대 AI PC를 선보인다. 산업용 AI 서버와 관련한 협력 관계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캐논과 히타치, 스바루 등 일본 기업들이 다수 등장했다. SK텔레콤과 카카오클라우드 등 일부 국내 기업도 AMD 생태계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수 CEO는 “최근 AI 도입의 가속화로 AMD의 고성능 컴퓨팅 플랫폼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며 “AI가 사실상 모든 비즈니스에 변화를 주고 삶의 질을 높일 뿐만 아니라 컴퓨팅 시장의 모든 부분을 재구성한다는 면에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흥미진진한 시기”라고 말했다.
AMD는 GPU 신제품 외에 AI 컴퓨팅의 전반적인 영역에 걸친 신제품도 공개했다. 코드명 ‘튜린(Turin)’으로 불리는 5세대 에픽(EPYC) 프로세서 제품이 올해 하반기 출시될 예정이다. AMD의 차세대 ‘젠5’ 아키텍처와 DDR5 메모리를 탑재한 소비자 PC용 프로세서 라이젠 9000 시리즈도 하반기 선보인다. 수 CEO는 “에픽의 점유율은 2018년 2% 수준에서 올해 1분기 33%까지 성장했다”며 “라이젠 9000 시리즈의 경우 가장 빠른 일반 소비자용 프로세서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컴퓨텍스에서는 수 CEO를 비롯해 크리스티아누 아몬 퀄컴 CEO, 르네 하스 ARM 최고경영자 CEO 등 세계 반도체 업계를 이끄는 ‘빅맨’들이 총출동했다. 하스 CEO는 기조연설을 통해 “내년 말까지 전 세계에서 ARM 칩을 탑재한 1000억 개의 인공지능이 가동될 것”이라며 AI 시장의 급속 성장세가 한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아몬 CEO는 “PC의 새 시대가 도래했다”며 AI PC용 칩셋인 ‘스냅드래곤 X 엘리트’를 선보였다. 퀄컴은 전통적으로 모바일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강자였지만 최근에는 PC용 칩셋인 스냅드래곤 X 엘리트를 MS의 AI PC 신작 코파일럿+PC에 탑재하며 AI PC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달 18일 출시되는 삼성전자의 갤럭시 북4 엣지에도 퀄컴의 칩이 탑재됐다.
아몬 CEO는 “차세대 인공지능의 잠재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플랫폼”이라며 “스냅드래곤 X 엘리트의 와트당 성능은 인텔의 코어 울트라7보다 5.4배, 애플의 맥북 프로 M3보다 2.6배 높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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