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MC·UMC와 같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회사는 대만의 반도체를 대표한다. 대만의 반도체가 이들 기업만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대만은 칩 공정을 마무리하는 후공정 회사는 물론 첨단 칩을 설계하는 팹리스 회사까지 글로벌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대만의 인재들이 현지에서도 자신의 경쟁력을 더욱 키울 수 있는 풍부한 토양이 마련돼 있는 것이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대표적 메모리 회사들에 의존하는 비대칭적인 한국 반도체 생태계와는 대비되는 모습이기도 하다.
24일 시장조사 업체 테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후공정(OSAT) 분야에서 매출 상위 20위를 기록한 기업들 가운데 상위 10개가 대만 기업인 것으로 집계됐다. 1위는 전통적 후공정 강자인 대만 ASE가 차지했고 파워텍테크놀로지·KYEC·칩본드 등 대만에 본사가 있는 후공정 회사들이 ‘톱10’ 안에 들었다.
이들은 TSMC가 완성한 전공정 웨이퍼를 받아서 자르거나 기판에 결합하고 보호 물질을 씌우는 사업을 한다. 대만은 이 시장에서 절반에 가까운 46%의 점유율을 확보하고 있다.
칩 설계 분야에서도 유의미한 매출을 가진 팹리스 기업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지난해 대만에서는 미디어텍을 포함한 256개의 팹리스가 기업 활동을 했는데 올해는 270개까지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대만에서 석박사를 수료한 인재들은 자신의 전공을 살리면서 마음껏 기량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 있다는 뜻이다.
대만이 인력을 끌어들일 수 있는 탄탄한 반도체 인프라를 갖추게 된 것은 약 40년간 지속된 현지 정부의 노력 때문이다. 대만 반도체 생태계는 1970년대 미국 반도체 기업들이 값싼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해 현지에 후공정 공장을 설립하면서 시작됐다. 외국인 투자에서 반도체 산업의 가능성을 확인한 대만 정부는 1980년 신주과학단지라는 초대형 연구단지를 설립하고 1982년에는 ‘초대형 집적회로(IC) 발전 플랜’을 집행하면서 민간투자와 결합해 TSMC를 탄생시켰다. 이후 20년간 꾸준하고 집약적인 정부의 투자가 빛을 발하면서 1990년 후반부터는 민간기업이 더욱 늘어났고 소문을 들은 ‘유학파’들의 귀국과 활약까지 이어졌다.
2020년대까지 반도체 토양을 다진 대만은 이제 인력을 적재적소에 공급하기 위한 예산을 쏟아부으며 ‘퀀텀점프’를 시도하고 있다. 2021년 5월 대만 정부가 제정한 ‘국가 중점 분야 산학 협력 및 인재 육성 혁신 조례’가 대표적이다. 국립대학과 반도체 연구학원에 한해서는 규제를 완화해 반도체와 인공지능(AI) 분야 정원 확대도 추진했다. 이를 위해 정부가 매년 6억 대만달러, 기업은 2억 대만달러를 투입하고 있다.
이렇게 확장된 인재 풀이 한 몸처럼 연계돼 서로 이끌고 밀어주면서 세계의 유명한 반도체 인재들도 대만에 집중하고 있다. 올해 6월 컴퓨텍스를 찾은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모리스 창 TSMC 창업자, 차이밍제 미디어텍 회장, 린바이리 콴타컴퓨터 회장 등을 닝샤야시장으로 불러 모은 것도 이러한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광경이다.
한국은 대만의 풍부한 생태계와는 다른 상황이다. 물론 한국은 세계에서 D램 점유율이 70%가 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보유하고 있고, 삼성 파운드리는 TSMC에 이어 세계 2위 점유율을 확보하고 있는 반도체 강국이다. 그러나 이 두 회사를 제외하면 열악한 생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지난해 후공정 시장에서의 점유율은 단 4%에 불과하다.
반도체 설계 업계는 더욱 심각하다. 한국 팹리스 업계가 세계시장에서 3% 미만의 점유율로 고전을 면하지 못하자 인력들이 업계를 하나둘 떠나면서 우리나라 회사들은 ‘카드 돌려막기식’으로 인력을 보완하고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최근 학생들은 연봉과 기업의 성장 가치 등을 고려해 삼성전자·SK하이닉스나 외국계 기업 취직에 관심을 가지는 상황”이라며 “정부가 수년째 반도체 인력 양성에 대한 정책을 강조하고 있지만 피부로 느낄 만큼 큰 변화는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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