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장마감 후 시장에 깜짝 뉴스가 전해졌습니다. MBK파트너스가 영풍(000670)으로부터 고려아연(010130) 지분을 넘겨 받고 이 회사의 최대주주가 된다는 주주간 계약이 발표된 것이죠. 이튿날 아침 MBK와 영풍은 고려아연 주식을 2조 원어치 추가 공개매수 하겠다고도 밝혔습니다.
고려아연은 두 가문이 수십년 간 동업해 일궈 온 회사입니다. 고(故) 최기호·장병희 창업주가 1949년 세운 영풍이 출발점이 됐고 이후 고려아연이 설립돼 지금에 이르고 있죠. 크게 보면 장 씨 가문은 영풍을, 최 씨 가문은 고려아연을 경영해 왔습니다. 두 회사 지분을 두 가문이 나눠 가지면서 75년 간 한 지붕 두 가족 체제를 이어왔습니다.
그러나 오너 3세로 접어들면서 동업 정신에도 균열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지난해부터는 이 갈등이 수면 위로 올라와 세상에도 본격 알려졌는데요. 이번에 장 씨 일가의 영풍이 이 싸움에 종지부를 찍고자 한국 최대 자본으로 평가 받는 MBK를 끌어들였으니, 이들의 대결에 시장의 관심이 쏠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약 이번 계획이 모두 실현되면 MBK는 고려아연의 단일 최대주주가 되는 것과 동시에 영풍 측 의결권까지 공동 행사하게 될 예정입니다. 즉 MBK가 고려아연의 경영권을 확보하는 것이죠. 1974년 설립된 고려아연의 경영권이 50년 만에 처음으로 외부로 넘어가는 겁니다.
이번 기사에서는 MBK가 왜 고려아연 경영권을 확보하려는지, 현재 어떤 전략을 취하고 있는지, 이런 시도의 배경은 어디에서 비롯 됐는지에 대해 다각도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주주간 계약에 공개매수, 가처분 신청까지…촘촘한 전략 무장
우선 MBK가 오스템임플란트 경영권을 인수했던 지난해 1월로 시계를 돌려보겠습니다.
오스템임플란트는 2021년 한 직원의 2000억 원대 횡령 등 부정적 사건들이 누적돼 행동주의 펀드로부터 공격 받았습니다. 위협을 느낀 최규옥 회장은 MBK에 본인 경영권 지분을 약 2700억 원을 받고 팔기로 합니다. 당시 MBK는 최 회장의 지분을 사는데만 그친 게 아니라 2조 원 넘는 돈을 투입, 시장에 남아있는 주식을 모두 공개매수로 긁어 모아 지분 전체를 확보하고 상장폐지를 이뤄냈습니다. 최대주주 지분을 인수하며 공개매수까지 활용하는 새로운 인수·합병(M&A) 성공 방정식을 만든 셈입니다.
같은해 12월 MBK는 한국앤컴퍼니(000240) 지분을 이 회사 오너가 장남인 조현식 고문과 손잡고 인수하기로 했습니다. 방식은 공개매수로 동일했죠. 최대주주인 차남 조현범 한국앤컴퍼니 회장 입장에선 적대적 M&A 시도였습니다. 결국 아버지인 조양래 회장이 다시 한번 차남에 힘을 실어주며 경영권 방어에 나서자 MBK의 계획은 실패로 막을 내립니다.
MBK는 이렇게 두 차례의 공개매수를 통해 중요한 경험치를 획득한 것으로 보입니다. MBK의 이번 고려아연 경영권 확보 플랜을 보면 오스템임플란트 때의 성공 방식을 우선 활용한 것으로 평가 됩니다. 주주간계약을 바탕으로 최대주주 지분을 먼저 확보한 뒤, 대규모 자금으로 공개매수해 경영권을 완벽히 손에 쥐겠다는 것이죠.
동시에 한국앤컴퍼니 때 실패 경험을 발판 삼아 전보다 촘촘한 계획을 세웠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MBK는 공개매수 발표 당일 고려아연이 자사주를 매입하지 못하도록 법원에 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습니다. 최윤범 회장 측이 회삿돈이나 우호 세력 등을 통해 주식을 취득하는 방식으로 공개매수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조치한 셈입니다.
같은날 영풍도 법원에 고려아연 회계장부 열람 및 등사 가처분을 신청했는데요. 과거 고려아연의 부당한 사모펀드 투자 행태 같은 사법 리스크를 대내외에 부각시키려는 의도입니다. 지금은 여론전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죠. MBK와 영풍은 최 회장이 경영권을 방어할 틈을 주지 않고 압박하기 위해 이런 전략을 한꺼번에 펼친 것으로 보입니다.
MBK의 전략은 또 있습니다. 이번 공개매수는 다음달 4일 끝나는데, 추석 연휴와 10월 초 임시공휴일·국군의날·한글날 연휴를 제외하면 실제 증시 개장일은 10 영업일 밖에 되지 않습니다. 증시 개장일이 적다는 것은 주가 변동성을 최소화 할 수 있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공개매수 성공 확률이 높아집니다.
또 이번 연휴와 공휴일엔 대형 로펌과 컨설팅회사, 투자은행(IB)들도 공식적으론 모두 휴업합니다. 최 회장 측이 외부 전문가들과 방어 전략을 촘촘히 세우지 못하도록 이 시기를 골랐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주주가치에 눈 뜬 한국 증시…MBK 결단에 힘 실어
MBK는 한국에서 활발히 투자하고 기업을 경영하며 성장했습니다. 현재는 한국, 중국, 일본에서 약 300억 달러(약 40조 원) 이상의 자산을 운용하는 아시아 최대 사모펀드 중 한 곳으로 컸습니다.
보통 국내에서 활동하는 사모펀드들은 대기업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딜을 따내는 전략을 취하곤 합니다. MBK도 비교적 최근까지는 이와 비슷한 노선을 걸어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근 1~2년 사이에는 사뭇 달라졌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초대형 펀드 MBK는 왜 한국앤컴퍼니, 고려아연을 타깃 삼아 경영권 분쟁의 한복판으로 뛰어든 것일까요?
시장 관계자들은 한국 시장이 최근 주주 가치 제고에 부쩍 눈을 뜨고 있다는 데 기본 원인을 찾고 있습니다. 국내 증시에 투자하는 개인 투자자 수는 현재 약 1500만 명에 육박했습니다. 최근 2~3년 사이엔 행동주의 펀드의 활약이 많아졌죠. SM엔터테인먼트 이수만 창업주의 부당한 경영 활동을 비판했던 얼라인파트너스, KT&G에 주주환원 확대와 CEO 교체를 요구한 플래시라이트캐피탈 등의 활약이 두드러졌습니다.
최근엔 두산그룹이 두산로보틱스(454910)와 두산밥캣(241560)을 합병하려다 거센 역풍을 맞고 한발 물러난 사례도 있었습니다. 두산의 이 계획을 정면에서 흔든 사람은 다름 아닌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었죠. 실제 정부도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고자 밸류업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있습니다.
또 한편에선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같은 비영리단체들이 두산의 합병 방식에 대해 일침을 놓는가 하면, 재벌들의 잘못된 경영 행위를 강하게 비판하는 목소리도 내고 있습니다. 분명 한국 증시에서도 전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가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주가치 제고에 관심이 높은 전문가들은 대주주의 1주와 소액주주의 1주가 동일한 가치를 갖고 있다는 자본주의의 통념을 공유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 기업은 이사회의 결정으로 큰 그림이 그려지고, 이사회를 통해 선임된 경영진들은 주주 전체를 위해 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기류도 읽힙니다.
이런 소용돌이들이 MBK 같은 결이 같은 대형 펀드를 만나 태풍으로 변했다고 봅니다. MBK는 실제 한국앤컴퍼니나 고려아연처럼 현금 창출력이 훌륭한 회사가 여러 부정적 환경 때문에 저평가 받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MBK는 이런 회사에 방향키만 제대로 잡아줘도 더 높은 성장을 일굴 수 있으며 주주들에게 더 큰 환원을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으로 보입니다.
현대차·LG·한화 등 고려아연 주주사 결정에 관심 쏠려
MBK가 한국 시장의 특성을 무시하고 기업을 무리하게 흔들고 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한국 전통의 대기업들이 일궈온 가치를 만만히 보고 너무 급하게 글로벌 스탠다드를 찾는 것 아니냐는 말들도 나옵니다.
MBK가 그간 해왔던 투자 행태들을 보면 과연 전체 주주들을 위해 일한 것이 맞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는 것도 사실이죠. MBK가 인수했던 기업들은 주로 경영 효율화를 위한 구조조정을 했으며, 이를 통해 MBK는 회사 재무를 다듬은 뒤 다른 자본에 비싸게 팔아넘기는 사례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MBK는 이런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시장의 적잖은 투자자들이 인식하고 있습니다.
한편 이번 고려아연 분쟁에 특히 관심이 더 쏠리는 이유가 있는데요. 현대차나 LG, 한화 등 한국을 대표하는 재벌들이 현재 고려아연의 주주사로 참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원래 최 회장 측의 백기사로 분류됐었죠. 이번 MBK의 시도를 어떻게 바라볼지, 누구의 편에 서게 될지 궁금해집니다.
MBK의 이번 시도가 성공으로 끝나면 한국 자본시장의 역사로 기록될 것입니다. 다만 실패하더라도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태풍은 소멸되더라도 강한 흔적을 남기게 되기 때문인데요. 이 상처와 흔적을 복구하기 위해 기업들도 잘못된 점을 돌아보는 등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