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중 반도체 규제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독주하고 있는 ‘1위’ 시장을 견제하는 포석도 깔려 있다. 안정적인 매출을 뽑아낼 수 있는 ‘레거시’ 반도체 시장에서 한국 업체들이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구도를 짜면서 중국을 견제할 뿐 아니라 미국이 약세인 D램 공급망을 자국에 유리하게 형성해서 ‘메모리 다극화’를 만들겠다는 의도를 분명하게 담았다.
◇레거시 HBM 주력인 中 수출길 막은 미국=2일(현지 시간) 미 상무부 산업안보국(BIS)은 이번 반도체 수출통제 개정안에서 중국을 비롯한 ‘무기 금수국’에 내년부터 고대역폭메모리(HBM) 수출을 금지한다는 내용을 포함해 발표했다. 메모리 대역폭이 ㎟(제곱밀리미터)당 초당 2GB(기가바이트)를 넘는 HBM이 대상이다. 사실상 세계에서 생산되는 모든 HBM을 중국으로 수출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HBM은 고성능 인공지능(AI) 전용 칩에 함께 탑재되는 D램이다. 시장점유율을 보면 SK하이닉스가 1위, 삼성전자가 2위,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가 3위다. 이 규제는 당장 삼성전자를 겨냥했을 가능성이 크다. 삼성전자는 중국 AI 반도체 회사들이 주로 구매하는 구형 HBM인 3세대 HBM(HBM2) 시장에서 90% 이상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전체 HBM 매출에서 중국 매출은 20% 안팎을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구형 HBM 시장에서 매출을 만들어 HBM3E 등 최첨단 HBM 시장에서 1위 자존심을 회복해야 하는 삼성전자는 미국 규제로 인해 중요한 매출원을 잃을 가능성이 커졌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최근 중국 D램 업체들이 HBM2 양산까지 시작한 가운데, 미국 규제로 수출길이 더욱 좁아져 삼성전자의 HBM 사업은 더 곤란한 상황에 처할 것 같다”고 말했다.
◇中 최대 D램 회사는 손대지 않은 미국=이번 미 정부 제재의 중요한 특징은 중국 최대 규모의 D램 업체인 창신메모리(CXMT)를 제재 대상에서 제외한 것이다. 미국이 CXMT를 리스트에서 뺀 것은 압도적 선두인 한국 회사들의 투자를 견제하기 위한 움직임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CXMT는 D램 제품 중에서 용량이 낮은 8Gb(기가비트) 칩 등 레거시 품목에서 D램 생태계를 흔들고 있다. 시장조사 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CXMT는 올 2분기에 3억 3474만 개의 8Gb D램을 생산했다. 지난해 2분기 생산량인 1억 3982만 개보다 2.3배나 늘어난 수치다. 이 칩은 16Gb 등 고용량 D램에 비해서 수익은 낮은 편이지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는 여전히 현금 창출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캐시카우’ 제품이다.
미국은 세계 D램 시장에서 공급과잉을 주도하고 있는 CXMT를 활용해 자국 회사인 마이크론의 라이벌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현금 창출을 막고 선행 반도체 투자를 견제하겠다는 전략을 깔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한국의 ‘범용 장악→미래 칩 투자’ 공식 깨질 수도=한국 업체들은 세계 D램 시장에서 70% 이상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레거시 시장에서 특유의 가격경쟁력과 생산능력을 바탕으로 큰 매출을 낸 뒤 이 돈을 선단 공정에 투자하는 전략으로 숱한 라이벌 회사들을 꺾었다.
그러나 이번 미국의 제재로 이 공식이 깨질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미국이 레거시 시장에서 한국 D램 업체에 대한 견제를 지속하고 자국 우선주의를 기반으로 마이크론에 대규모 지원금을 지급한다면 한국의 메모리 위기가 더욱 커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여기에 해외 라이벌 업체들의 기술 수준도 무섭게 올라오고 있다. CXMT는 레거시 시장에서만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 삼성전자보다 기술 수준이 5년 정도 뒤처진 10㎚(나노미터·10억분의 1m)급 3세대(1z)급 제품을 주력으로 생산하고 있지만 10나노급 4세대 제품 개발 및 차세대 메모리인 3차원(D) D램 기술 연구에 박차를 가하며 역전을 노리고 있다. 마이크론 또한 HBM3E 8단에서 삼성전자보다 먼저 엔비디아의 승인(퀄) 테스트를 통과하는 등 저력을 과시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경기 불황으로 적극적인 투자에 나설 수 있는 여력이 부족해지고 있어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삼성전자는 2분기에 보유 현금이 100조 원대를 회복했지만 지속적인 주가 하락 등으로 지난해 2분기부터 올 1분기까지 90조 원대를 기록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우리나라 반도체 회사들은 고가 제품을 겨냥하는 연구개발로 승부를 봐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며 “정부는 반도체 인력과 인프라·생태계 조성에 도움을 주는 방식으로 국내 업체들을 최선을 다해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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