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 무산으로 정치적 불확실성이 장기화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성장과 환율에 직격탄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비상계엄 사태의 후폭풍이 아니더라도 내년 성장은 1%대로 점쳐졌는데 탄핵 정국이 길어질 경우 경기 침체가 장기화하고 원·달러 환율이 1500원까지 치솟을 수 있다는 전망이 흘러나온다.
8일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에 따르면 노무라증권은 최근 한국의 정치 상황을 반영해 원·달러 환율이 내년 5월 1500원까지 상승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국의 정치적 특수 상황 외에도 각종 대외 여건 악화가 원화 값을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내년 출범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대(對)중국 관세 압박이 커질 경우 위안화 가치가 하락하고 원화도 동반 약세를 보일 것이라는 얘기다. 한은의 적정 외환보유액 비율이 국제통화기금(IMF) 평균의 93% 수준에 불과해 통화 당국이 원화 약세를 방어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 노무라의 판단이다.
미 대형은행 뱅크오브아메리카(BofA)도 비슷한 전망을 내놓았다. BofA의 아시아 금리·외환전략 공동책임자인 아다르시 신하는 7일(현지 시간)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원화가 9일 장이 열리면 (가치가) 급락할 수 있다”면서 “그렇지 않아도 경기가 좋지 않아 금리 인하 가능성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탄핵마저 불발해 원화가 급락할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이미 한국의 국정 혼란은 원화 값에 반영되고 있다. 7일 뉴욕 역외차액결제선물환(NDF) 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장보다 10.86원 급등한 1424.14원을 기록했다. 시장에서는 야권이 꺼내든 ‘매주 탄핵’ 카드를 포함해 정치적 갈등이 길어지면 투자심리가 더 꺾일 수 있다는 우려가 짙어지고 있다. 최진호 우리은행 애널리스트는 “정치적 노이즈 자체가 외국인투자가들의 자금 이탈 요인이 된다”면서 “원·달러 환율이 1450원을 터치하고 그뒤 시장 불확실성이 더 커진다면 1500원에 가까운 1480원까지 내다봐야 한다”고 말했다.
권아민 NH투자증권 연구원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당시에도 원·달러 환율 상승은 강달러 압력 등 국내 정치적 요인으로만 움직이지 않았다”며 “현재 내년 1월 트럼프 취임을 앞두고 이미 강달러 기조인데 대내 요인까지 겹치며 당분간 원·달러 환율에서는 하락 재료가 없다고 봐야 한다”고 짚었다. 원화는 지난주 달러 대비 1.86% 평가절하돼 주요국 통화 대비 약세 폭이 가장 컸다. 역외 위안화(-0.36%), 호주달러(-1.32%) 등도 달러 대비 약세였지만 원화보다는 절하 폭이 크지 않았다.
환율이 오르면 수입물가가 상승해 내수 경기가 어려워지는 악순환이 반복될 수 있다. 특히 한국은 식량 자급률이 낮아 밀가루·커피·치즈 등 식품 원재료를 주로 수입하는데 한국의 최근 3개년(2021∼2023년) 평균 곡물 자급률은 19.5%로 20%가 채 되지 않는다. 경기 둔화 속 물가가 다시 상승하면 스태그플레이션을 맞을 가능성이 높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당장 현물 시장에서 곡물·원유를 달러로 사와야 하는데 환율로 인해 물가를 자극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라며 “이미 수출 시장에서는 중국에 가격경쟁력이 밀린 상태이기 때문에 원화 약세 효과를 누리기도 어려워 보인다”고 지적했다.
빠른 시간 내 혼란이 수습되지 않으면 대외 신인도가 하락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세계 3대 신용평가사 중 하나인 피치는 이미 한국의 정치적 사태가 장기화되면 신용도 하방 압력이 커질 수 있다며 경고음을 울렸다. 류덕현 중앙대 경제학부 교수는 “당초 올해 경제성장률을 2.2%로 예상하고 있었는데 현재 급속도로 얼어붙는 정치 상황을 볼 때 4분기 성장이 축소될 수 있다”며 “이 경우 올해 경제성장률은 2.0%까지 내려갈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내년 상황은 더 심각하다. 한은은 내년 성장률을 1.9%로 제시했는데 글로벌 투자은행(IB) 8곳의 평균치인 1.8%와 큰 차이가 없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이보다도 낮은 1.7%를 제시해 내년 경제 상황을 더 엄중하게 바라봤다. 현대경제연구원은 “단기 경기 부양책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내고 있다. 류 교수는 “기업들의 경우 현 정치 상황에 맞춰 내년에 경영을 아주 보수적으로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기업의 큰 투자가 정체되고 소비 부문에서 내구재 소비가 움츠러들면 내년 성장률은 더욱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염명배 충남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성장률이 1%대 후반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데 그 정도 수준을 각오해야 하는 상황인 것은 맞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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