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 단독 감액 예산안 통과 방침을 고수하면서 내년도 정부 예산안에 대한 불확실성이 크게 높아졌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우원식 국회의장을 만나 예산안 합의 통과를 요청했지만 여당 리더십이 공백인 데다 민주당이 10일 본회의에 상정해 처리하겠다는 의지가 워낙 강해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야당의 일방적인 감액안이 통과될 경우 민생과 산업 등 경제 전방에 메가톤급 후폭풍이 빚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9일 기재부에 따르면 최 경제부총리는 이날 국회에서 우 의장과 약 20분간 비공개 면담을 진행하고 국회에 내년 예산안과 관련한 정부의 입장을 전달했다.
최 부총리는 면담 직후 “한국의 대외 신인도 유지와 경제 안정을 위해 여야 합의에 의한 예산안의 조속한 확정이 필요하다”며 “의장님께 큰 리더십으로 여야 (예산) 협상의 물꼬를 터 달라고 요청했다”고 말했다. 여야 합의를 통해 각종 증액 사업도 예산에 반영되도록 도와달라는 것이다. 앞서 민주당은 지난달 말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를 열고 헌정 사상 처음으로 합의 없이 673조 3000억 원 규모의 내년도 예산안을 단독 처리했다. 예결특위에서 일방적으로 처리된 예산안에는 기재부의 동의가 필요한 증액은 빠지고 4조 1000억 원 감액만 반영됐다.
문제는 감액 예산안이 실제로 국회를 통과할 경우 당장 내년 1월 1일부터 민생과 치안, 사회복지, 연구개발(R&D), 주력 산업 전반에서 재정 공백이 생긴다는 점이다. 예상치 못한 재난·재해 등 발생 시 쓰이는 예비비가 정부안 4조 8000억 원에서 2조 4000억 원으로 반 토막이 났을 뿐 아니라 대통령실을 비롯해 검경과 감사원 특수활동비 및 특정업무경비 761억 5500만 원도 전액 삭감됐다. 이 안에는 마약 수사, 보이스피싱과 같은 국민 생활 침해 범죄 수사, 사회적 약자 대상 범죄 수사 등을 진행할 때 필요한 특활비·특경비도 모두 포함돼 있어 당장 수사·치안에 공백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국고채 이자 상환을 위한 예산도 5000억 원 줄었다.
국가 경제를 뒷받침할 주요 사업 예산도 대거 삭감됐다. 동해 심해 가스전 개발 사업에 쓰일 예산은 약 506억 원에서 약 8억 원으로 98.3% 깎였고 혁신성장펀드·원전산업성장펀드 등 산업 지원을 위해 정부가 산업은행에 출자하기로 한 예산도 총 288억 원 삭감됐다. 팬데믹에 대비한 메신저리보핵산(mRNA) 백신 개발, 미국 신행정부 출범에 따른 대외 전략 구상, 민관 합작 선진 원자로 수출 기반 구축 등 각종 R&D 예산도 모두 줄줄이 깎였다.
각종 민생·복지 사업도 중단되거나 축소 집행될 위기에 처했다. 야당이 전공의 수련수당을 비롯해 전공의 지원 예산을 931억 원이나 줄인 데다가 청년과 취약 계층 아동의 자산 형성을 돕는 청년도약계좌·아동발달지원계좌 지원 예산도 각각 280억 원, 21억 4800만 원씩 줄였기 때문이다. 야당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생활 안정 지원에 쓰일 돈과 기초연금 급여 예산도 각각 6400만 원, 500억 원씩 줄인 상태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초유의 감액 예산안이 당장 내년 초 사회 전반에 각종 공백을 발생시킬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도 국민들에게 정부 불신을 안겨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홍기용 인천대 경영학부 교수는 “예산안 심사 과정에서 감축은 당연히 있을 수 있지만 규모 자체도 평년보다 훨씬 클 뿐만 아니라 기존에 정상적으로 기능해왔던 것들을 전혀 할 수 없게 만든다는 점에서 질적으로도 나쁜 기능 상실형 감축”이라며 “전공의, 특활·특경비 등에 대한 예산을 싹뚝 잘라 사업 자체를 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매우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감축”이라고 비판했다.
이 같은 지적에도 민주당은 앞서 거론했던 7000억 원 추가 감축은 뺀 4조 1000억 원 감액 예산안 처리를 강행하겠다는 입장이다. 윤종군 민주당 원내대변인은 “여야와 기재부가 예산안을 최종 협의하고 있다”면서도 “결론이 나지 않으면 10일 본회의에서 처리한다는 것이 방침이며 현재로서는 합의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만 국회의장이 여야 대표회담을 통해 이번 예산안 문제를 풀어가겠다고 언급해 상황 전개 추이를 막판까지 지켜봐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