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국회 탄핵소추안이 가결되면서 권한대행 체제로 국정이 운영되게 됐지만 정권 차원의 ‘주고받기 식’ 거래를 해야 하는 외교·통상 부문에서 정책 공백이 커지고 있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과의 협상에서는 모든 품목을 테이블에 올려놓는 ‘패키지딜’이 필수인데 이를 이끌 동력이 부족하다. 전문가들은 국회가 정부와의 협업 체계를 서둘러 구축해 ‘트럼프 2기’에 대응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16일 국무총리실에 따르면 비상계엄 사태에 현재 국방부와 행정안전부 장관이 공석이다. 박성재 법무부 장관과 최재해 감사원장, 조지호 경찰청장도 야당 주도의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해 직무가 정지됐다.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역시 탄핵 심판이 진행 중이다.
문제는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온 트럼프 행정부 출범이다. 트럼프 당선인은 보편관세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등을 내세워 한국을 압박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에너지 및 반도체·배터리·조선 등 협력(산업통상자원부) △무기 수입(국방부) △주둔비 협상(외교부) △농수산물 수입(농림축산식품부) △바이오 및 의약품(보건복지부) △플랫폼 규제(공정거래위원회) 등 전 부처가 함께 거래 목록을 만들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다. 이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필요한 것을 얻어내는 것이다. 전직 정부 고위 관계자는 “(미국과는) 패키지딜로 해야 한다고 보면 된다”며 “지금은 내각이 무너져 누가 책임지고 나서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했다.
이는 대통령실을 중심으로 컨트롤타워를 구성해야 가능한 일이다. 한덕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고 있지만 현상 유지를 뛰어넘는 외교와 협상을 하기는 어렵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김태황 명지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국회가 결의문이라도 채택해 적어도 대외 통상에 관해서는 현 정부 체제에서 권한을 발휘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근혜 정부 때와 비교하면 글로벌 정세는 엄혹한데 운신의 폭은 좁은 것이다. 영국의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공식 가입만 해도 그렇다. 영국이 15일 공식 회원국이 됐지만 정부는 야당 눈치를 보다가 가입 신청 시점을 놓쳤고 이제는 아예 가입 얘기를 꺼낼 수도 없는 상황에 처했다.
한국국제정치학회장을 지낸 이상환 한국외국어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16일 서울경제신문과의 통화에서 “보호무역주의 기반의 미국 신정부에 대응하기 위해 한일 양국이 공조한다면 협상력을 높일 수 있을 것”이라며 “일본 주도의 CPTPP에 가입하는 것은 그런 측면에서 의미가 있는데 논의가 진전되지 못해 아쉽다”고 지적했다.
연장선에서 한국과 일본의 경우 대미 무역흑자가 많고 미국에 방위를 의존하고 있으며 에너지의 해외 의존도가 높다는 점에서 양국이 보조를 맞출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탄핵 정국이라는 한계가 뚜렷하지만 국회의 협조와 지원 아래 미국산 액화천연가스(LNG)를 일본과 공동 수입하는 방안이 가능한 것 아니냐는 얘기다. 이 교수는 “미국을 다루기에는 한일 관계가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일본과 우리는 상황이나 입장이 다르지만 어느 정도 보조를 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미국의 전방위 압박에 대통령 탄핵 사태가 겹쳐 정부가 나 홀로 대응하는 것이 쉽지 않다.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만 해도 트럼프 당선인은 한미 양국이 10월 타결한 제12차 방위비분담금특별협정(SMA)에 대한 재협상을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 당선인은 대선 후보 시절 한국을 ‘머니머신’으로 언급하면서 연 100억 달러(약 14조 원)의 방위비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정부는 국내 배터리 업계의 핵심 광물 기지인 인도네시아와의 협력도 난항을 겪고 있다. 탄핵 정국에 대사 임명이 6개월째 미뤄지고 있는 것이다. 주인도네시아 대사로 내정된 방문규 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지금까지 아그레망(주재국 부임 동의)조차 받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국회 차원의 지원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은다. 여야를 떠나 정치권이 발 벗고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김양희 대구대 경제금융학부 교수는 “현시점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신정부 출범 전에 트럼프 측 인사와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일”이라며 “대통령 탄핵으로 정상외교가 올스톱된 상황에서는 국회의장이나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장이라도 미국으로 건너가서 의회와 산업계 인사들을 만나야 한다”고 말했다. 주제네바 대사를 지낸 최석영 법무법인 광장 고문 역시 “우리가 대외 여건과 통상 환경 변화에 대해 국가 이익을 지키고 공세적인 입장을 취하려면 여든 야든 대외적으로 안정적인 메시지를 줄 수 있는 협업 체제가 돼야 한다”고 주문했다.
미국 행정부가 한국의 리더십 공백을 알고 있는 만큼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학계의 조언도 있다. 김태황 명지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산업부 장관과 통상교섭본부장을 중심으로 통상의 권한을 발휘할 수 있도록 국회가 행정부에 전권을 부여하는 메시지나 결의문을 낼 필요가 있다”며 “골든타임이 얼마 안 남았다. 야당이 통상만큼은 국익 차원에서 도와줘야 한다”고 설명했다.
트럼프 당선인의 취임과 동시에 나올 한국 관련 법안에 대비해야 한다는 지적 또한 제기된다. 김태중 한국무역통상학회 부회장은 “트럼프는 집권하고 한국과 관련된 여러 정책을 내놓을 가능성 높다”며 “임기 시작과 동시에 발동될 법안에 대한 철저한 대비와 대응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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