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산업 육성과 규제 근거를 담은 국내 최초의 기본법이 탄핵정국 속에서 가까스로 국회 문턱을 넘어 제정된다. 다만 이는 빠르게 강화하고 있는 글로벌 AI 규제 대응을 위한 첫걸음을 뗀 것에 불과하는 게 전문가의 평가다. 최근 가짜뉴스(허위정보)·딥페이크 등 AI 부작용에 맞서 전 세계적인 규제 표준, 이른바 글로벌 스탠다드 수립 움직임이 본격화한 상황에서 자국 기업 보호를 위해서는 정부의 관련 제도 정비와 업계의 선제적인 자구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26일 국회는 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은 재석 264명 중 찬성 260명, 반대 1명, 기권 3명으로 통과시켰다. 이날 정보기술(IT) 업계에 따르면 정부는 내년 2월 10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주요국 참여로 열릴 ‘파리 AI 행동 정상회의’에서 5개 주요 세션 중 하나인 ‘AI 신뢰(Trust in AI)’ 세션 개최를 주도적으로 맡기로 했다. 한국 측 인사가 회의를 주재하는 식의 방안을 프랑스 측과 논의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이 올해 5월 ‘AI 서울 정상회의’에 이어 파리에서도 AI 안전에 관한 글로벌 논의를 주도하겠다는 것이다. 또 파리 AI 정상회의에서는 유럽연합(EU)이 자국 AI법에 따라 전 세계 기업들이 따라야 할 가이드라인인 ‘행동강령(code of conduct)’을 마련할 거라는 전망이 나오는 등 AI 안전이 전체 행사의 핵심 주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맞춰 이날 ‘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안(AI 기본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것을 두고 입법을 추진한 정부는 물론 업계에서도 “한숨 돌렸다”는 반응이 나왔다. EU가 AI법을 새해에 본격 시행하는 등 전 세계적으로 AI 안전 확보를 위한 규제가 강화하는 가운데 한국 역시 AI기본법을 만들어 기업들을 규제 환경에 적응시켜 해외 진출을 도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가짜뉴스, 딥페이크, 개인정보와 저작권 침해 등 AI 기술의 폐해가 심해지면서 이를 예방할 관련 기술과 정책을 일컫는 AI 안전 확보가 성능만큼이나 중요해진 상황이다.
김명주 AI안전연구소장은 “기업들이 AI를 수출하려면 글로벌 규제를 받을 수밖에 없다”며 “차라리 AI기본법과 그에 따른 선제적 규제로 국내에서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해외로 나가는 게 효율적”이라고 평가했다. 한 AI 기업 관계자도 “가이드라인 없이 기술 홀로 발전할 수는 없다”며 “경쟁국보다 늦지 않게 명확한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은 환영할 일”이라고 말했다. AI기본법은 이용자의 생명과 안전, 기본권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AI 기술을 ‘고영향 AI’로 규정하고 AI가 만든 콘텐츠에 워터마크(식별표시)를 넣는 등 개발사의 AI 신뢰성 확보 노력을 의무화하며 위반행위에 대해서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사실조사와 시정명령을 할 수 있도록 한다.
다만 AI기본법이 제효과를 내려면 시행령 마련 등 후속조치가 시급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대표적으로 고영향 AI를 구체화해야 한다”며 “가령 기본법상으로는 의료기기에 쓰이는 일부 AI 시스템을 고영향 AI로 보는데 구체적으로 어느 기술이 범주에 해당하는지를 알아야 기업들이 개발 방향을 잡고 우려를 덜 수 있다”고 전했다.
AI기본법만으로는 산업 지원에 역부족이라는 지적도 있다. AI 전력 수요 충족을 위해 필요하지만 국회에 계류 중인 국가기간전력망 확충 특별법 등이 함께 처리되지 않으면 AI기본법이 반쪽짜리 정책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경전 경희대 빅데이터응용학과 교수는 “AI기본법만으로는 큰 의미가 없다”며 “AI 산업 육성은 민간 투자 유치와 이를 통한 오픈AI 같은 딥테크 차업이 핵심”이라고 말했다. 이어 “주52시간제나 세액공제 등 민간 투자를 활성화할 전반적인 제도 정비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위원장인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로 추진동력을 잃은 국가AI위원회의 재정비도 과제다.
이에 과기정통부도 시행령 포함 하위법령 마련을 내년 12월 기한보다 이른 6월까지 마치는 등 후속조치를 서두른다는 방침이다. 산하 AI안전연구소는 EU와 협력해 한국 기업들이 국내 법에 따른 인증만으로도 현지 시장에 AI 서비스를 출시할 수 있도록 상호인증 제도 협력을 추진할 계획이다. 국내 기업들이 전 세계적으로도 특히 강력한 규제로 평가받는 EU의 AI법 대신 국내 법을 충족하는 것만으로도 현지 사업을 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김 소장은 “다른 나라들과도 비슷하게 협력을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 최초 AI 규제인 EU AI법은 AI기본법의 고영향 AI와 비슷한 ‘고위험 AI’뿐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 등을 위배해 사용 자체가 금지되는 ‘수용 불가 위험 AI’를 포함해 ‘제한된 위험성을 갖는 AI’, ‘저위험 AI’ 등으로 AI 위험 등급을 세분화해 규제한다. 수용 불가 위험 AI 관련 규정을 위반한 기업은 글로벌 연 매출의 최대 7% 또는 3500만 유로(533억 원)를 제재금으로 내야 한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