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인 선박 기술자 윌리엄 잭 던컨은 한국 조선업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1974년 현대중공업이 중동 선사인 UASC사로부터 수주한 2만3000톤급 다목적 화물선 24척을 제대로 만드는지 감독하러 온 기술책임자였다. 당시는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거북선이 그려진 지폐 한 장과 모래사장을 찍은 조선소 부지만을 갖고서 세계 각국을 돌며 배를 수주하던 시기였다. 현대중공업은 막상 배를 수주했지만 선박 건조 경험이 전무했다. 그때 던컨은 감독관 대신 기술 전수자를 자처했다. 한국 조선 산업의 기틀을 다지고 기술 노하우를 전수했다. 그 덕에 현대중공업은 UASC에 24척의 배를 큰 탈 없이 인도할 수 있었다. 던컨은 이후 현대중공업의 기술자문을 맡아 30여 척의 배를 만드는 데 도움을 줬다.
지난해 12월 26일 국내 원자력 분야에서 외국인 최초로 동탑산업 훈장을 받은 다니엘 브루스 포네만 전 미국 에너지부 부장관은 ‘원전판 잭 던컨’과 같은 인물이다. 지금은 우리나라가 아랍에미레이트(UAE)·체코 등에 원전을 수출하는 기술강국이 됐지만 첫 시작은 조선업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국내 최초 원전인 고리1호기는 미국 웨스팅하우스사의 기술 이전이 없었다면 지을 수 없었다. 이후도 마찬가지다. 미국과 원전 분야에서의 지속적인 협력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의 원전도 존재할 수 있다. 산업부 고위 관계자는 “우리나라 조선업과 자동차 산업이 맨 땅에서 글로벌 선두 지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외국인 기술자들이 큰 역할을 했다”며 “원전도 미국의 기술 이전과 협력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고 말했다.
포네만 부장관은 한미 원전 협력의 산 증인이다. 그는 미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디렉터(1990~1993년)와 에너지부 장관부 장관(2000~2014년)에 이어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미국 원전 연료 공급업체 센트루스 에너지의 최고경영자(CEO)를 지냈다. 1990년대 북핵 위기를 중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에너지 부장관 시절엔 양국의 원전 분야 정책·사업 협력을 주도했다. 최근엔 미국 싱크탱크인 아틀랜틱 카운슬 소속 위원으로 한미 양국의 원전 수출 협력과 제3국 공동 진출 필요성에 대해 강연하고 있다.
정부는 포네만 부장관에게 훈장을 주기로 결정할 때 잭 던컨의 사례를 참조했다고 한다. 정부는 2011년 국내 조선산업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해 던컨에게 최고 영예인 금탄산업훈장을 수여했다. 던컨은 1981년 53세 나이로 세상을 떠나 상은 아들인 앤드루 던컨이 대신 받았다. 산업부 고위 관계자는 “런던 상무관 시절 던컨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했던 기억을 되살려 원전 업계에는 어떤 인물이 있는지를 살펴봤다"며 “한미 기업간 지재권 분쟁이 있지만 결국 양국의 원전 협력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수 밖에 없다. 그런 측면에서 포네만 부장관에게 훈장 수여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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