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가 지난해 사상 최고 매출과 영업이익을 각각 기록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범용 D램과 낸드플래시 가격이 일제히 하락세로 돌아섰음에도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첨단 메모리가 실적을 견인한 결과다. 그동안 업황 사이클을 타고 실적의 진폭이 컸던 메모리반도체 시장에서 ‘게임의 법칙’이 달라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SK하이닉스는 23일 지난해 4분기 매출이 19조 7670억 원, 영업이익은 8조 828억 원을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분기 기준 사상 최대 매출이며, 분기 영업이익률은 41%에 달했다. 4분기 실적을 합산한 지난해 매출과 영업이익은 각각 66조 1930억 원, 23조 4673억 원으로 역시 창사 이래 최고 실적이다.
SK하이닉스의 이번 실적은 메모리반도체 업계의 상식을 뒤집은 결과다. 지난해 메모리 시장은 정보기술(IT) 기기의 수요 부진과 중국 메모리 업체들의 물량 공세로 인해 하반기 이후 약세를 보였다. 삼성전자가 지난해 4분기 시장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영업이익(6조 5000억 원)을 냈던 배경에도 이 같은 사이클 부진이 있었다.
하지만 SK하이닉스는 HBM 등 인공지능(AI) 메모리를 무기로 업황 다운턴을 이겨냈다. 김우현 SK하이닉스 최고재무책임자(CFO·부사장)는 “고부가가치 제품의 매출 비중이 크게 늘고 메모리 산업이 고성능 고객 맞춤형 시장으로 변하면서 시황 조정기에도 메모리 업체가 안정적 이익을 창출하는 것이 가능해졌다”고 설명했다. 앞으로는 사이클에 관계없이 꾸준한 성과를 낼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 SK하이닉스의 주력 상품인 D램에서 HBM이 차지하는 매출 비중은 40%까지 치솟았다. HBM 매출은 지난해 전년 대비 4.5배 이상 늘었고 올해도 100% 이상의 성장이 예상된다는 게 회사 측의 설명이다. 선단 제품의 생산을 늘리는 대신 더블데이터레이트(DDR)4 등 범용 제품의 생산 비중은 크게 축소한다. 지난해 20%에 달했던 범용 D램의 생산 비중은 올해 한 자릿수로 줄이기로 했다. 빅테크 업체들의 러브콜을 받고 있는 HBM4 12단 제품은 연내 공급을 시작하고 HBM4 16단은 내년 하반기부터 공급에 나서기로 했다.
HBM 넘어 차세대 D램도 경쟁력 1위…"적수가 안보인다"
‘메모리반도체 왕국에서 열린 SK하이닉스의 대관식.’
23일 진행된 SK하이닉스의 실적 발표회를 지켜본 반도체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SK하이닉스의 1위 선언 같았다”는 반응이 나왔다. 메모리 시장의 만년 2등이었던 SK하이닉스가 이제는 고대역폭메모리(HBM)와 같은 특정 제품뿐만 아니라 단일 D램 공정에서까지 경쟁 업체들의 추격을 뿌리칠 수 있을 정도로 격차를 벌렸다는 자신감을 여러 대목에서 거침없이 드러내면서다. SK하이닉스는 또한 이익 창출 능력이 떨어지는 구형 메모리 분야에서는 생산량 조절의 가능성을 열어놓기도 했다.
◇10나노급 6세대 D램 “목표 수율 넘었다”=SK하이닉스는 우선 첨단 D램 공정에 관한 기술적 격차를 강조했다. 김우현 SK하이닉스 최고재무책임자(CFO·부사장)는 10㎚(나노미터·10억분의 1m)급 6세대 D램의 개발 현황에 대한 질문에 “이미 개발 단계에서 초기 양산 목표 수율을 웃돌았다”고 강조했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하반기 이 D램을 세계에서 최초로 개발했다.
SK하이닉스의 발표대로라면 6세대 D램 공정에 관한 개발 속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이다. 삼성전자는 회사 내부에서 10나노급 6세대 D램을 올 5월 안에 양산 승인을 받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제품 재설계를 결정했을 만큼 공정 구현이 까다롭고 어려운 것으로 알려졌다. SK하이닉스는 제품을 먼저 개발한 것은 물론 생산성까지 고도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CFO는 “올해 하반기 일반 D램에 공정을 적용해 양산을 시작하고 유의미한 수준의 원가 절감까지 가능할 것”이라고 밝혔다.
최근 거세지는 중국 D램 업체의 추격 역시 기술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 CFO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중국 D램 회사들이 구형 제품인 더블데이터레이트(DDR)4 등의 공급을 확대하고 있지만 최신 제품인 DDR5 제품에서는 확실한 격차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HBM4 16단 내년 하반기 출시=HBM 사업도 여전히 강세다. 회사는 최첨단인 5세대 HBM(HBM3E) 12단 제품의 출하량이 올 상반기 안에 HBM3E 제품 가운데 절반 이상을 차지할 것으로 내다봤다.
차세대 제품 역시 순조롭게 개발되고 있다. 6세대 HBM(HBM4) 12단 제품은 올해 안에 출시되고 초고적층 제품인 HBM4 16단 칩은 내년 하반기에 선보일 방침이다. SK하이닉스 측은 “2025년의 HBM 매출은 전년 대비 100% 성장할 것”이라고 관측했다.
내년 HBM 판매 물량에 대한 협상도 이미 착수했다. 김기태 SK하이닉스 HBM 영업&마케팅 담당은 “올해 상반기 중에는 내년 물량의 대부분을 판매 완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올해 설비투자도 HBM 중심으로 이뤄진다. 회사는 올해 설비투자액(CAPEX)의 대부분이 HBM 라인을 확보하기 위한 청주 M15X, 2027년 첫 가동 예정인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쓰일 것이라고 발표했다.
업계에서는 SK하이닉스가 당분간 최첨단 10나노급 6세대 D램보다 HBM3E 12단 등에 활용되는 10나노급 5세대 공정 확장에 집중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5세대 D램을 공격적으로 증설하기 위해 주성엔지니어링·VM 등 전 공정 장비 회사에 다수의 장비를 주문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메모리 ‘디커플링’ 심화에 구형 제품 감산하나=올해 SK하이닉스는 메모리 ‘디커플링’ 현상 심화에도 대응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메모리 시장에서는 HBM·서버용 메모리 등 초고성능 제품의 판매가 증가하고 있다. 반면 PC·스마트폰 제품 등 범용 D램 수요는 정체돼 시장 양극화가 심화하는 추세다.
SK하이닉스는 범용 제품의 생산량을 줄이는 방안을 살펴보고 있다. 우선 회사는 실적 발표회 자료에서 1분기 D램 비트 그로스(D램 생산량 증가율)가 10% 초반으로, 같은 기간 낸드는 10% 후반대로 줄어들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실상 감산을 시사하는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한편 SK하이닉스는 연간 고정배당금을 기존 1200원에서 1500원으로 상향 조정하며 총 현금 배당액을 1조 원 규모로 확대한다고 발표했다. 김 CFO는 “신규 주주 환원 정책을 통해 당사의 재무 건전성이 강화되면 안정적인 기업가치 제고가 가능하고 실적 개선이 이어지면 추가 환원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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