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중국산 후판에 최대 38.02%의 잠정 관세를 부과하기로 했다. 철강 품목에 부과된 반덤핑관세로는 역대 최고 수준이다. 중국산 저가 철강의 밀어내기 수출을 막겠다는 조치지만 미국에서 발발한 ‘관세 전쟁’이 한국과 중국·일본으로까지 전선을 넓힐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산업통상자원부 무역위원회는 20일 제457차 무역위원회를 열고 현대제철이 제소한 ‘중국산 탄소강 및 그 밖의 합금강 열간압연 후판 제품’에 대해 27.91~38.02%의 잠정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현대제철은 지난해 7월 중국산 후판이 25.89% 싸게(덤핑률) 들어와 국내 기업들에 피해를 입히고 있다며 반덤핑 조사를 요청한 바 있으며 이번 잠정 관세는 덤핑률보다 더 높게 책정됐다. 정부가 중국 업체들의 저가 제품 밀어내기 공세가 미치는 영향이 심각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풀이된다.
국내 산업계에서는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현대제철과 포스코 등은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 반면 중국산 후판을 활용해 원가를 맞춰왔던 조선 업계에는 비상이 걸렸다. 조선 업계의 한 관계자는 “중국이 과도한 상계관세 부과를 빌미로 보복관세를 물릴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중국산 후판에 대해 시장 예상치를 상회하는 잠정 관세를 부과하자 국내 철강 업체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철강 업계의 한 관계자는 “그동안 세계 각국이 자국 산업 지키기에 나섰는데 한국만 보호 장치가 없었다”며 “국내 철강 산업에 방어벽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제 철강 업계는 중국 기업들의 저가 물량 밀어내기 탓에 고사 위기라는 평가까지 받았다. 이번에 잠정 관세가 부과된 후판만 해도 이달 10일 기준 국내산 가격은 톤당 90만 원을 넘긴 데 비해 중국산은 75만 원 선으로 약 20% 가까이 저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2024년 중국산 후판 수입액은 7억 6200만 달러로 전체 후판 수입액(14억 달러)의 54.4%를 차지했다.
후판은 코일이 아난 판재 형태로 가공된 철강재로 두께가 4.75㎜ 이상이고 폭이 600㎜가 넘는 제품을 일컫는다. 중국산 공세 속에 포스코의 지난해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29.3% 떨어진 1조 4730억 원을 나타냈다. 여기에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철강 관세 25%까지 겹치면서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등 일부 신용평가사를 중심으로 신용등급 하락에 대한 경고음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이번에 정부가 매긴 관세가 과거보다 높아진 것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그동안 중국산 철강 제품에 대한 최고 반덤핑 관세는 2021년 중국산 H형강에 대해 부과한 32.72%였는데 이번에는 그보다 6%포인트가량 세율이 높아졌다. 정부가 철강 업계 고사를 막기 위해 강력한 조치를 내놨다는 게 철강 업계의 분석이다. 과거 정부는 중국·대만·인도네시아산 스테인리스 평판압연에 대한 반덤핑 조사를 진행할 당시 최대 49.04%의 예비 덤핑률을 책정한 바 있으나 조사 대상 기업들이 가격을 스스로 조정하는 ‘가격 약속’을 제안하면서 잠정 관세는 부과하지 않았다.
잠정 관세는 본조사 결과가 나오기 전 국내 산업 피해를 막기 위해 임시로 부과하는 상계 관세다. 조사 개시 이후 최종 결과가 나오기까지 1년~1.5년 가까운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임시 조치를 하는 것이다. 잠정 관세가 결정된 뒤 본 조사가 마무리되기까지는 3~7개월 소요된다.
일단 한숨을 돌린 철강 업체와 반대로 조선·건설 업계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그동안 중국산 후판 사용을 늘려왔는데 하루아침에 도입 가격이 30% 이상 오른 상황이기 때문이다. 조선 업계 관계자는 “선박 원가에서 후판이 차지하는 비중이 20% 가까이 된다”며 “수주 당시 예상했던 것과 달리 원자재 비용이 급증하면 이익률이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우려했다. 그는 “최근 미국과의 협력 가능성이 높아져 업계에 기대가 높아지고 있는데 찬물을 끼얹는 소식이 들려 안타깝다”고 전했다.
공사비 급증과 시장 수요 부족으로 불황을 겪고 있는 건설 업계의 부담도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후판은 각종 공장을 짓거나 송유관 등에 쓰이는 강관을 만드는 재료이기 때문이다. 후판을 생산하지 않고 구입해 새로운 제품을 가공하는 중소 철강 업체도 속내가 복잡한 것으로 알려졌다. 철강 업계 관계자는 “사실상 후판을 만드는 곳은 포스코와 현대제철 두 곳뿐”이라며 “높은 관세가 부과되면 울며 겨자먹기로 비싼 제품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라고 토로했다.
여기에 중국산 후판뿐 아니라 최근 일본·베트남산 철강재에 대한 무역 구제 조치가 이어지고 있어 이들 국가가 보복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점도 문제다. 김태황 명지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철강 업계가 워낙 어렵다 보니 정부로서도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면서도 “앞으로 있을 미국과의 협상에서 한국이 자국 산업만 보호하려는 나라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통상 업무에 종사하는 정부 관계자 역시 “국내 제철사들은 결국 내수보다 수출의 비중이 더 크다”며 “국내 시장을 보호하려다 수출 시장을 잃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중국산 후판에 대한 최종 반덤핑 관세율은 잠정 관세율보다는 소폭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국내외 이해관계자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에서 국내 산업 피해에 대한 우려가 반영되기 때문이다. 잠정 관세는 제소 기업의 피해에 초점을 맞춰 빠르게 결론을 낸다면 본 조사는 충분한 시간을 갖고 국내 여러 업계의 상황과 외국 기업의 의견 등을 두루 고려한다는 의미다. 통상 최종 반덤핑 관세율이 잠정 관세율보다 낮은 경향이 있는 것도 이때문이다. 중국·대만·인도네시아산 평판압연에 대한 반덤핑 조사 때와 같이 조사 대상 기업들이 파격적인 가격 조절을 제안할 경우 반덤핑 관세 부과 없이 가격약속 조치로 변경될 가능성도 있다.
한편 무역위는 이날 중국·대만·인도네시아산 스테인리스 평판압연 제품에 대한 반덤핑 관세(9.07~25.82%) 조치도 5년 연장하기로 결정했다. 현대제철이 제소한 일본·중국산 열연강판에 대한 반덤핑 조사도 이달 중 착수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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