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연금 개혁에 실낱같은 여야 합의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 야당이 정부·여당의 ‘자동조정장치’를 조건부로 수용하기로 하면서 물꼬가 트이는 양상이다. 자체안으로 상임위 처리를 예고했던 야당은 수위 조절에 들어갔고 여당도 야당과 협상에 나서겠다는 입장이라 극적인 타결 가능성이 나온다. 상속세 개편과 추가경정예산 편성도 정치권 공감대가 형성된 비과세 한도 상향과 신산업 추경부터 합의를 모색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23일 정치권에 따르면 국정협의회 4자 회담 이후 여야 간 각종 민생 입법을 두고 쟁점 해소를 위한 물밑 접촉이 이어지고 있다. 협의회는 빈손 회동에 그쳤지만 악화하는 여론 부담에 이달 임시국회 내 민생 현안을 해소할 가능성이 어렵사리 만들어지고 있다는 평가다.
소득대체율(정부·여당 42%, 야당 44~45%)에서 막혀 있는 연금 개혁의 경우 자동조정장치가 파국을 막는 지지대 역할을 하고 있다. 자동조정장치는 경제 상황이나 인구구조 변화에 따라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을 조정하도록 한 것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이를 조건부로 수용 의사를 밝혀 협상의 불씨를 살렸다.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도 이날 기자 간담회에서 야당의 자동조정장치 수용 의사에 “(여당도) 유연성을 발휘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민주당 관계자는 “정부가 소득대체율 42%를 완강하게 주장하고 있지만 소수점까지 동원해 합의 가능성을 높이려고 한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여야 내부적으로는 상속세 공제 확대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야당은 상속세 일괄 공제를 5억 원에서 8억 원으로, 배우자 공제를 5억 원에서 10억 원으로 상향하는 내용의 상속세 및 증여세법 개정안을 당 차원에서 추진하고 있다. 개정안을 발의한 임광현 의원이 권 원내대표에게 상속세 토론회를 제안했고 권 원내대표도 이날 “얼마든지 환영한다”고 밝혀 접점 찾기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여당의 한 핵심 관계자는 “공제 한도를 우선 높이고 순차적으로 기업의 최대 현안인 최고세율 인하를 압박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만족할 만한 합의 수준은 아니어도 공제 한도 상향 자체가 부의 이전으로 인한 소비 진작 효과를 도모할 수 있는 만큼 상속세 개정 기회를 날려서는 안 된다는 위기의식이 감지된다.
추경 편성도 이 대표가 13조 1000억 원 규모의 민생 회복 소비 쿠폰을 양보할 수 있다고 밝혀 타협의 여지가 있다.
다만 권 원내대표는 “편성된 올해 예산안 집행 과정을 살펴 부족한 곳과 필요한 예산을 검토해야 한다”며 조기 집행이 우선이라는 입장이다. 그러면서도 인공지능(AI), 반도체, 로봇, 첨단 바이오 등 신산업 집중 투자에는 여야 이견이 없다는 점에서 ‘핀셋 추경’ 가능성은 여전히 살아 있는 카드라는 해석이다.
일각에서는 조기 대선이 추경을 확대하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는 관측을 제기한다. 선거가 가시화될 경우 급해진 여당마저 현금 살포에 눈을 돌려 이 대표의 전 국민 민생 회복 소비 쿠폰과 같은 현금성 추경에 나설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박창환 장안대 특임교수는 “선거 때 국민의힘도 현금성 추경에 동조하는 경우가 빈번했다”며 “추경의 지원 대상을 명확하게 정해놓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특히 “여야의 교집합이라 할 신산업 분야라도 빠르게 (추경 편성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도 “중도층 표심이 필요한 여야 모두 책임을 갖고 실질적인 성과를 낼 수 있게 법안 처리를 위해 움직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책 대결이 결국 성과 없이 종료될 경우 여야 모두 조기 대선 국면이 큰 상황에서 ‘서로 네 탓’ 공방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쓴소리도 나왔다. 이규정 고려대 연구교수는 “(연금·상속세 등의 경우) 합의 도출에 9부 능선을 넘고 있는 사안들인데도 타결되지 않으면 귀책 사유를 상대에 떠넘겨 대선 캠페인에 활용할 것”이라며 “21대 국회 마지막에 접점을 찾았던 연금 개혁도 총선 앞에 폐기해버린 바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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