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주요 공기업들이 지방 이전 이후 다양한 인재 선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전력·인프라 구축 등에서 글로벌 기업들과 경쟁해야 할 공기업들이 ‘우물 안 개구리’에 머무르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16일 서울경제신문이 입수한 주요 공기업 6곳의 ‘최근 20년간 신입 사원 출신대학 현황’에 따르면 국내 최대 공기업인 한국전력은 지난해 단 1명의 서울대 출신 사원도 선발하지 못했다. 지난해 기준 직원 평균 연봉이 8161만 원으로 ‘신의 직장’으로 불리는 한전에서 2018년부터 2024년까지 서울대 졸업 신입사원은 56명에 불과했다. 반면 전남대 출신은 18년부터 24년까지 410명으로 서울대 출신 신입 사원(56명)의 7배가 넘었다.
특히 2018년 이후 7년간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성균관대, 서강대 등 서울 주요 대학 5곳의 졸업자를 모두 합쳐야 433명으로 전남대(410명) 한 곳과 비슷했다. 이는 지역인재 의무채용이 시행되기 전인 2005~2017년 서울 주요 대학 5곳을 졸업한 신입사원이 925명으로 전남대(308명)보다 오히려 3배 더 많은 것과 대조적이다.
반면 지방 국립대인 전남대 출신 신입 사원은 크게 늘었다. 지난해 선발한 전남대 출신 사원은 총 25명으로 전체 대졸 신입 사원 206명 중 12.1%를 차지했다. 전남대 출신 신입 사원은 한전이 전남 나주시로 본사를 이전하기 직전인 2012년의 15명과 비교해 10명 더 늘었다. 한전의 한 해 매출이 94조 원에 달할 정도로 거대한 기업인 점을 감안하면 인재들의 지역 편향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평균 연봉 1억 육박 가스공사…지방 거점국립대 독식
다른 공기업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지난해 기준 직원 평균 연봉이 9601만 원에 달하는 또 다른 ’신의 직장‘인 가스공사도 지방 거점국립대학인 경북대 출신이 독식을 하는 구조이다. 지난해 전체 채용 규모는 124명이었는데 경북대가 21명으로 전체 신입사원의 17%를 차지할 정도로 가장 많았고, 영남대가 13명으로 뒤를 이었다. 반면 서울권 대학의 경우 서울대 3명, 고려대 2명, 연세대 2명에 그쳤다. 지역인재 의무채용이 도입된 18년 이후 7년간 가스공사 입사자를 놓고 보면 경북대는 130명에 달했지만 서울대는 16명, 고려대 48명, 연세대 24명, 서강대 10명, 성균관대 28명에 불과했다. 이는 서울권 주요 대학 5곳(126명)을 모두 다 합쳐도 경북대(130명) 한 대학보다 많지 않은 것이다.
이같은 지역 거점대학으로의 쏠림은 2018년부터 시행한 지역 인재 의무 채용 규제(신입 사원 중 지역 인재 비중 35%)와 지방 이전 이후 취업 준비생들의 지역 기피 심리가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문제는 이 같은 인재 편중 현상이 공기업들의 경쟁력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공기업 내부에서 파벌이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김용진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는 “노조에 형·동생 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카르텔을 형성하다 보면 기타 지역 인재가 배제되는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다”며 “더 다양한 인재를 뽑을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문가 “인력 채용에 지역 제한 둬서 안 돼”
전문가들은 공기업이 경쟁력을 키우려면 인력을 채용하는 데 있어서 지나친 장벽을 둬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지방 이전 공기업들이 지역인재 채용 제도에 매몰되면 한정된 풀 안에서만 직원을 뽑을 수밖에 없고 이는 장기적으로 우수 인재 지원 감소로 이어져 성장 전략에 차질을 빚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국회입법조사처는 최근 보고서에서 “지역 인재 채용으로 특정 출신 대학 편중 현상이 나타나면 기관 내 특정 부문 종사자의 전문성 부재가 발생하고 이는 궁극적으로 공공서비스 품질 저하와 경쟁력 상실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업계에 따르면 지방으로 이전한 대다수의 공기업은 실적 부진에 시달리고 있다. 전남 나주시에 본사를 둔 한국전력공사는 2021년부터 3년간 영업이익이 적자를 보이다가 지난해 겨우 흑자 전환했고 한국철도공사는 2022년 3970억 원, 2023년 4415억 원 적자를 기록했다. 지난해 실적도 큰 폭의 개선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경남 진주시로 이전한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2023년 영업이익은 건설경기 부진 여파에 전년에 비해 98%나 감소했다. 이들 공기업이 장기 성장을 도모하려면 여러 방안을 강구해야 하지만 경쟁력 강화를 주도할 미래 인재 채용도 반드시 필요하다.
이 때문에 초중고를 지방에서 나와도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닌 경우 지역 인재 채용 대상에 포함하도록 현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꾸준히 나온다. 지난해 1월 개정된 지방대육성법에 따르면 비수도권 공공기관은 신규 채용시 지역 인재를 35% 이상 의무적으로 채용해야 하고, 지방 인재 대상에는 해당 공공기관이 위치한 지방대뿐만 아니라 비수도권의 지방대로 범위가 확대됐다. 비수도권까지 범위를 넓혀야 특정 대학 편중 현상을 막을 수 있다는 지적을 반영한 것이다.
◇블라인드 채용인데 지역인재 채용 확대 ‘모순’…수도권 대학 역차별 논란
하지만 지역 인재 의무 채용이 강화되는 와중에 블라인드 채용까지 적용받아 수도권 대학 출신 지원자들의 공공기관 입사 기회가 줄어드는 이른바 역차별 논란이 커지고 있다. 블라인드 정책으로 출신 대학을 평가 요소로 보지 않겠다면서도 지역 인재 채용 의무화 때문에 출신 대학이 최종적으로 평가 결과에 반영되는 모순적 상황에 부딪치는 것이다. 고려대 행정학과를 졸업한 김 모 씨(26세)는 “출신 대학이 채용에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이 블라인드 채용의 기본 원칙인데 지방대 출신에게 혜택을 주는 것은 또 다른 차별”이라고 불만을 드러냈다. 공공기업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임 모 씨도 “요새는 취업 자체가 힘들어 인서울, 수도권 공기업에만 들어가려고 취업 준비를 하지 않는다”며 “해당 공기업이 위치한 지역에서 초중고교를 나온 이들도 지역 인재 채용 대상에 포함한다면 다양한 경력을 가진 인재 채용 기회도 더 늘어나고 지역 활성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입법조사처도 지난해 공공기관 이전 기관 특성에 따라 일부 조정할 수 있도록 자율권을 보장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예를 들면 이전 기관 소재지 지역 대학 졸업자는 15%만 뽑고 나머지 15%는 타 지방 대학을 졸업했지만 초중고교는 이전기관 소재지 지역에서 나온 구직자를 채용하는 방식이다. 이른바 경상도·전라도·충청도 출신 서울대 졸업생도 지역 인재 채용대상에 포함시키는 대안이다. 이창무 한양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과도하게 특정 대학의 사람들이 모이면 의사결정 과정에서 비합리성·비효율성이 커질 수밖에 없다”며 “지방 출신이라면 지역 인재 채용 대상으로 폭넓게 인정하는 게 쏠림 현상을 막는 대책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각 공기업의 인사위원회에 외부 인사를 더 많이 영입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홍성걸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는 “특정 대학의 쏠림 현상을 바로잡으려면 지역 인재 채용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누구냐도 중요하다”며 “인사위원회·평가위원회에 외부 인사 비중을 늘려 견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홍 교수는 “어떤 형태로든 조직 내에 자정작용이 필요하다”며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투명한 인사 시스템을 구축하고 지역 이해관계에 얽히지 않은 인사를 많이 늘려야 하며 기관장들도 이를 충분히 숙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기업 인재 불균형 심화…경쟁력 저하에다 토호화 우려
문제는 공기업들의 인재 불균형 현상이 이 같은 경쟁력 저하를 더욱 부추길 수 있다는 점이다.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앞으로 우리나라가 제2의 도약을 하기 위해서는 공기업들이 글로벌 기업들과 경쟁해야 하는데 지방 이전 이후 10년이 지나면서 성장 대신 현상 유지에 멈춰 있다”고 지적했다.
인재 편중이 장기화되면서 공기업 내부에서 ‘토호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공기업 A사의 한 관계자는 “특정 국립대 출신이 급격히 많아지면서 다른 대학 출신이 승진에서 불리한 것이 아니냐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온다”면서 “취업준비생들 사이에서 지방 토호화 이야기가 나오면서 비(非)지방 출신들이 입사를 꺼리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공기업의 토호화가 글로벌 경쟁력 강화에 역행하는 조치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세계 시장 진출을 통해 전력 유틸리티 기업으로 발돋움한 이탈리아 전력회사 에넬(ENEL)이 우리나라의 반대 사례다. 김동철 한전 사장은 지난해 신년사에서 “전 세계 29개국에서 재생에너지와 전력망 사업을 펼치는 에넬이 한전의 모델”이라며 “기술 혁신과 글로벌 시장 진출로 도약을 이뤄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한전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과거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으로부터 반도체 설계기업 ARM에 대한 공동 투자 제안을 받고도 각종 투자 규제 때문에 기회를 놓친 실패의 경험을 다시 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함께 나온다.
이번 기회에 공기업 지방 이전과 인재 채용 제한 등 전반적인 제도에 대해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이창무 한양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핵심이 되는 혁신도시를 중심으로 규모의 경제를 키워야 비효율의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고 공기업들도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고 설명했다.
동시에 조직 내 특정 대학·지역 출신이 모여서 생기는 문제가 있다면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는 조언도 제기됐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기업 내에서 세력화가 이뤄지는 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세력화는 관료제의 효율성을 해치는 존재라서 그런 부분이 있는지 검증 가능한 평가 지표를 만들고 전면적인 재점검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비수도권 안에서 여러 인재들이 계속 순환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좋을 것”이라면서 “수도권과 비수도권 격차를 해소한다는 차원에서 여러 인재 배치를 통합적으로 하는 건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기재부 관계자는 “공기업 토호화 관련 많은 문제점이 노출되고 있기에 제도적인 개선책을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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