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관세전쟁의 포성이 커지는 가운데 우리나라의 세계국채지수(WGBI) 편입이 내년 4월로 늦춰지면서 국내 국채시장에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최대 560억 달러(82조 원)의 선진국 자금 유입이 순차적으로 이뤄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내년으로 미뤄진 데다 하반기 새 정부 출범을 전후로 대규모 추가경정예산 편성 가능성까지 제기되면서 시장 참가자들 사이에 실망감이 커지는 분위기다.
9일 서울 채권시장에서 오후 3시 30분 기준 국고채 10년물 금리는 전 거래일보다 5.4bp(1bp=0.01%포인트) 오른 2.733%를 기록했다. 20년물 금리는 4.7bp 상승한 2.645%, 30년물 금리는 6.1bp 오른 2.540%를 나타냈다. 국채금리는 가격과 반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금리가 상승하면 국채 가격은 떨어진다. 장기물 국채금리는 이달 들어 하락세를 이어오다 전날 일제히 반등한 이후 이틀 연속 오름세를 보였다.
이날 국채시장에서 10년 이상 장기물이 약세를 보인 데는 한국 국채의 WGBI 편입 지연 영향이 컸다는 분석이다. 세계 3대 채권지수인 WGBI의 운영사인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스톡익스체인지(FTSE) 러셀은 이날 새벽 한국의 WGBI 편입 시점을 올해 11월에서 내년 4월로 변경한다고 발표했다. 편입 완료 시기는 내년 11월로 동일하다. 내년 4월부터 편입이 시작되지만 분기가 아닌 매달 편입 비중을 높여 계획된 시점에 편입을 끝내겠다는 게 FTSE 러셀 측의 설명이다.
과거 WGBI에 편입된 국가 중에 지수 편입 시작 시점이 변경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다. 중국의 경우 최종 편입 기간이 1년에서 3년으로 늘었을 뿐 지수 편입 시작 시점이 바뀌지는 않았다. FTSE 러셀 측은 한국 정부에 “편입 개시 시점 조정은 투자자들에게 투자 실행을 위한 내부 절차를 마무리하고 테스트 거래를 위한 준비 시간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라며 “WGBI 편입 효과 극대화와 제도 안착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시장의 분위기는 냉랭하다. 지수 편입 시점이 늦춰지면서 당초 기대했던 △선진국 자금 유입 △국채 조달 비용 절감 △달러화 유입에 따른 고환율 완화 효과 등도 모두 뒤로 밀리게 됐기 때문이다. 정부는 지난해 10월 WGBI 편입으로 국내 국채시장에 최대 560억 달러(82조 원)의 자금이 유입될 것으로 내다봤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WGBI 편입 자금은 1급수”라며 “가장 안전한 곳만 투자하고, 투자하면 잘 나가지 않는 돈이라 외환시장의 저변을 확대해준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편입 연기로 해외 자금의 국내 유입 시점이 늦어지면서 한국 국채금리가 지속 상승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올해 정부는 역대 최대 규모인 197조 6000억 원 한도의 국채 발행을 앞두고 있다. 원화 표시 외국환평형기금채권(외평채)의 발행 한도도 20조 원으로 잡혀 있다. 조기 대선을 전후로 추경까지 편성할 경우 적자 국채를 발행해야 한다. 가뜩이나 미중 관세전쟁 여파로 미 국채와 위안화가 동시에 약세를 보이는 상황에서 시장은 추가로 쏟아질 물량을 소화해야 하는 부담까지 떠안게 됐다.
박상현 iM증권 연구원은 “중국이 미국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미 국채를 투매할 것이라는 우려에 한국 국채시장 전반에 금리 상승 압박이 거세지고 있다”며 “11월 전후로 기대됐던 해외투자가의 매수 물량까지 줄어 들면 장기 국채금리도 뛸 수 있다”고 우려했다.
더 큰 문제는 이번 WGBI 편입 지연이 글로벌 투자자들의 한국 국채에 대한 신뢰 저하로 이어질 경우다. 채권시장의 한 관계자는 “FTSE 러셀이 불과 반 년 전에 발표한 내용을 수정한 것은 이례적”이라며 “새 정부 출범 이후 경제정책과 재정 운영 방향 등을 지켜보면서 최종 결정을 하겠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정부는 이번 조치를 편입 실무 과정에서 나타난 기술적인 현상으로 평가하면서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기재부 관계자는 “우리 정치나 경제가 영향을 줬을 가능성은 0%라고 생각한다”며 “지수 편입 및 운영과 관련해 투자자에게 일종의 준비 시간을 주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게 맞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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