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관세 전쟁의 방향을 중국 집중 공세로 전환했다. 당장 25%에 달하는 상호관세를 피해 90일의 유예 기간을 갖게 된 것은 호재지만 기본관세 10%와 자동차·철강 등에 대한 품목관세(25%)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 기업별로 셈법이 복잡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여기에 격화된 미중 갈등이 장기화될 경우 한국이 직간접적인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어 정부의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90일로 정해진 협상 시한 중 두 달을 담당할 권한대행 체제가 협상 전권을 쥐기 힘들다는 점도 문제다.
10일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세계무역기구(WTO)는 미중 양국이 관세 치킨게임을 지속할 경우 양국 교역 규모가 최대 80% 감소할 수 있다고 추정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다른 무역 상대국에는 상호관세 부과를 90일 동안 유예해 주면서 중국산 수입품에 대한 관세만 125%까지 끌어올리자 중국도 84%의 맞불 관세로 응수했는데 이 같은 관세율이 유지된다는 가정하에 계산된 수치다.
미중 양국의 지난해 교역 규모가 5834억 6000만 달러였으니 4667억 7000만 달러(약 681조 원)의 교역이 사라지는 셈이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당장 트럼프 대통령이 125% 관세를 행정명령에 담아 서명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협상용으로 보인다”면서도 “현실이 되면 사실상 무역을 상호 금지하는 수준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실제 트럼프 1기 당시에도 양국 교역 규모는 2017년 6360억 달러에서 2020년 5601억 달러로 12% 가까이 감소한 바 있다.
WTO는 미중 무역 갈등 장기화로 세계 경제가 두 블록으로 나눠질 경우 세계 실질 국내총생산(GDP)이 7%까지 위축될 것으로 전망하기도 했다. 한국의 교역망은 미중 양국에 깊게 얽혀있는데다 한국의 수출액은 세계 경제 성장과 긴밀히 연계돼 있어 이같은 시나리오가 현실이 되면 상당한 타격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당장 수출기업들은 미중 교역 축소에 따른 여파를 걱정하고 있다. 지난해 대중 수출액 1330억 달러 가운데 중간재가 차지하는 비중이 85.8%(1142억 달러)에 육박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대미 수출 급감이 한국의 대중수출 감소로 직결될 수 있다는 의미다. 중국이 미국에 팔지 못하는 상품을 다른 시장으로 밀어낼 경우 세계 곳곳에서 한국 기업들이 치열한 경쟁에 내몰릴 수 있다는 것도 문제다.
다만 중국 업체들과 점유율 싸움을 벌이고 있던 일부 산업군은 반사이익을 얻을 수도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중국 업체 추격이 무서운 디스플레이나 중국 업체가 양적 측면에서 앞서고 있는 2차전지의 경우 미국 시장에서 한국 제품이 선전할 수 있다는 얘기다. 조선업 역시 미국·유럽권 선주들이 중국보다 한국 업체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협상 기간이 90일로 늘어나면서 협상이 더 혼선을 빚을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미국 입장에서 보면 가격 흥정을 벌이던 와중에 갑자기 카운터 파트너가 전부 교체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현재 주요 국가들이 협상을 위해 미국에 접근하고 있으니 우리도 대행 체제 기간 중 관세 협상의 윤곽을 잡아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새 정부가 집권한 직후 곧바로 대미 협상에 나설 수 있도록 정치권이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조언도 나왔다. 김태황 명지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국익이 달린 문제인 만큼 여야가 함께 나서 협상에 나서는 정부에 힘을 실어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통상 문제에 대해서는 차기 대선 주자들이 완전한 신뢰를 보내줘야 경쟁 국가들보다 유리한 협상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허 교수도 “정치권이 통상 문제마저 진영 논리로 접근하면 정말 큰 일”이라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초당적 자세가 필요한 때”라고 덧붙였다.
트럼프 대통령의 방위비 분담금 증액 압박에 대한 대응도 쉽지 않다.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1기 때 방위비 분담금을 50억 달러(약 7조 원)로 올려야 한다고 요구한 바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방위비 분담금과 함께 주한미군 주둔, 상호관세 등 안보와 통상 현안을 모두 협상 테이블에 올리겠다고 한 만큼 주고받기 식 패키지 협상을 통해 안보 공백 우려와 통상 이슈를 함께 풀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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